이삼규의 산과야생화

숲의이야기

돌배나무 이야기

구상나무향기 2021. 11. 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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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배나무, 잘 익은 건 맛있다.

 

 

돌배나무는 산속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자람 터를 별로 가리지 않아서다. 돌배나무의 조상은 산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과육을 만들어 먹이고, 대신에 씨앗은 멀리 옮겨 달라는 유전자 설계를 해두었다. 덕분에 산짐승이 쉬어 간 고갯마루나 물 먹으러 왔다가 잠시 실례한 개울가 등 그들이 지나간 곳이면 어디에서나 터를 잡고 자란다.환경 적응력이 높은 탓에 배나무에는 유난히 종류가 많다.

 

 

우리가 흔히 먹는 개량종 참배나무 외에 돌배나무, 산돌배나무를 비롯하여 청실배나무, 문배주로 이름이 알려진 문배나무까지 한참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여기에다 팥배나무, 콩배나무, 아그배나무 등 사이비 배나무까지 합치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그러나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배가 열리는 나무는 대체로 돌배나무 아니면 산돌배나무다.

 

 

돌배나무는 주로 중부 이남에서 자라고 꽃받침 잎이 뾰족하며 열매는 다갈색이다. 반면 산돌배나무는 중부 이북에서 주로 자라고 꽃받침 잎이 둥글며 열매는 황색으로 익는다. 그러나 둘의 구별은 알쏭달쏭하기 마련이다. 그냥 쉽게 친숙한 이름인 ‘돌배나무’라고 불러도 산돌배나무가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산속에 달리는 돌배나무는 동물들에게 중요한 멋잇감이다.

 

 

산에다 두고 따먹기만 하던 돌배는 멀리 삼한시대부터 집 주위에 한두 포기씩 심으면서 과수로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자연히 사람들은 돌배나무 중 굵은 열매가 열리고 맛이 좋은 돌배를 골라다 심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청실배, 백운배, 문배, 황실배, 함흥배 등 이름을 날리는 품종이 생겨났다. 특히 청실배는 맛이 좋아 옛사람들도 흔히 키우던 배나무 종류다.

 

 

오늘날 개량종이란 이름으로 일본 배, 중국 배, 서양 배가 우리 돌배를 제치고 나라의 배 밭을 모두 점령해버렸다. 옛 맛을 아는 이라면 넘쳐흐르는 과즙과 너무 진한 단맛이 오히려 돌배에 대한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산속에서 아름드리로 자란 돌배나무는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 속살이 너무 곱고 치밀하여 글자를 새기는 목판(木板) 재료로 그만이다. 멀리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장인들의 눈에도 돌배나무는 일찌감치 각인되었다. 돌배나무는 베어져 부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새길 수 있도록 기꺼이 ‘육신공양’을 했다. 산벚나무와 함께 팔만대장경 판으로 만들어져 760년이 지난 지금도 민족의 위대한 문자 문화재로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으면서 해인사에 고이 누워 있다.

 

 

좌: 청실배, 우: 돌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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