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규의 산과야생화

산행기/지리산행기

눈폭탄 맞은 천왕봉 설경

구상나무향기 2021. 1. 1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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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뜻이 다른 산, 지이산(智異山). 

이성계가 나와 뜻이 달라 지이산으로 불렀다는 산. 

 

속에 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허튼소리도 있지만

엄연한 뜻은 "나와 뜻이 다르다"의 智異山

 

이성계의 일침이 아직까지도 전해져 이름까지도 지이산 즉 지리산으로 통한다.

 

 

 

 

 

 

 

어쨌든 뜻이 다른 지 맞는지는 몰라도 나의 노스탤지어 손수건은

거기에 걸려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무실 책상 앞 주식창 보다 더 눈길이 자주 가니

사랑하는 것 만은 분명한 가 보다.

 

 

 

 

역마살 달인.

 

 

첨단의 문물인 CCTV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지리산을 안방에서도 볼 수 있으니

딴은 하늘나라 선녀가 무색할 지경이다.

 

"이번 주 일욜이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점쟁이가 점을 치듯 하는 말이 아니고

하늘나라 선녀들도 참고한다는 공단의 CCTV 영상의 모습을 보고 판단한 역마살 달인의 점괘다.

 

 

 

 

 

 

신났다.

 

 

 

노심초사, 애써 만들어 낸 동장군의 작품이 녹아내릴까 싶어 안달 난 역마살 달인.

드디어 배낭을 메고 새벽밥 먹고 집을 나선 시간, 오전 5시다.

 

덕산에 이르니 기사식당은 불이 꺼졌다.

 

20년 가까이 밥을 얻어먹었는  불 꺼진 경우는 처음.

 

아주머니 대신 요즘은 외국인 아낙네 둘이 소담스레 차려주는 글로벌 밥상.

 

지리산 깡촌 덕산에도 글로벌 바람이 분다고 여겼는 데 

그 글로벌된 기사식당의 불이 꺼져 있는 게 아닌가.

 

"코로나 때문인가?"

 

중산리 공단 앞, 천왕봉 식당도 불이 꺼져 있었다.

이른 새벽, 시락국 한 그릇으로 아침 식사를 차려줬는데 요새 이곳도 불은 밝히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천왕봉 식당 믿고 꼭두새벽 아침 굶고 달려온 어떤 산꾼의 독백.

 

"아이고 어쩌쓰까 배고파 뒤지것네"

 

새벽에 문을 여는 식당이 요샌 잘 없으니 아침은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할 듯하다.

새벽이라 문을 안 여는 건 아니고 코로나 때문이다.

 

 

 

하얀 천왕봉

 

 

 

법계사를 지날 때까지 천왕봉은 안갯속.

그 속내를 드러내 놓지 않고 있었기에 설국 일지 아님 맹탕 일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전날 펑펑 내린 눈이라도 바람 한 번에 싹 사라져 버린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

 

다음 날 눈꽃 사정은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다만 어제 본 CCTV 속 눈꽃,

하루아침에 녹아내릴 때깔이 아닌 지라 

 

"분명 오늘까지 좋을 것이야"라며 자신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개선문을 시점으로 눈꽃은 어제와 같이 그대로 내 월급마냥 동결되어 있었고

개선문부터 천왕봉 끝간 데까지 하얀 설국으로 빚어 놓았다.

 

하늘나라 선녀들, 요샌 초과 근무를 잘 안 하는 모양.

눈꽃은 있을 때 봐야지 다음은 있을지 없을지 장담 못하는 지구온난화 속 지리산이다.

 

 

 

 

 

 

 

천왕샘을 기점으로 묵묵히 입은 열고 눈은 크게 뜨고

감탄은 신음이 되어 나직이 지리산에 묻은 시각.

 

사진으로만 감상해보자.

 

못 본 사람은 대충 "그날 이랬구나"하고 부러워만 하면 된다.

감탄은 내가 그날 실컷해줬다.

 

 

감탄해보자

 

 

 

천왕샘

 

 

 

 

 

 

 

 

본인 아님 주의. 잘생긴 일행임

 

 

 

"시베리아 북풍한설 차가운 눈보라... 를 뚫고서"라며

호들갑 떨기 딱 좋은 장면이지만

 

실제 나무 위 눈이 바람에 흩날리는 장면임.

 

사진만 보면 흡사 블리자드라고 말해도 믿을 듯.

 

 

 

 

나무 위에 눈이 흩날리는 장면임. 눈보라 아님

 

 

 

 

 

개인적으로 겨울 천왕봉에서 최고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천왕샘의 풍경과 바로 이 계단의 설국을 으뜸으로 친다.

 

궁금하면 가보시라 눈꽃 활짝 필 때 말이다.

 

 

 

 

 

이 계단 주위로 눈꽃이 피면 입이 절로 커진다.

 

 

 

 

내가 가진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해 이 형용 불구의 장면을

간직하기 위해 가려한 애를 써본다.

 

띵똥 띵똥

 

그 와중에 내가 본 이 멋진 자연풍경을 자랑하고자 수많은 지인들에게

보낸 문자들의 답장이 꼽힌다.

 

인도, 일본 그리고 중국까지

지인들에게 의해 세계 각국으로 실시간으로 송출된 지리산 천왕봉의 설국.

 

나는 그날 기자가 되었다.

 

 

 

 

 

 

 

나의 이상향이 천왕봉 꼭대기에 있는지 아님 동부능선 독바위 위에 걸려있는지는 몰라도

노스텔지어 손수건은 시시각각 방향을 달리 한다.

 

오늘은 천왕봉에 제대로 걸렸다.

 

천왕봉 오르는 계단길이 어찌 그리 가벼운지.

사뿐사뿐 날았다.

 

 

 

 

 

 

 

 

 

 

 

 

 

 

 

 

 

천왕봉 오르는 마지막 계단.

 

 

천왕남릉의 험준한 바위 터럭에도

눈폭탄이 쌓였다.

 

눈과 상고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날씨가 억시 추워 쌓인 눈이 얼어 굳은 게 눈꽃.

새벽에 습한 이슬이 얼은 게 상고대.

 

전날 폭설이 내렸다고 다음 날 눈꽃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바람 불면 확 사라져 버리는 것도 눈꽃의 특성.

 

 

 

눈꽃

 

 

천왕봉 끝자락에 피어난 눈꽃.

 

순백의 눈꽃이 코로나를 다 덮었으면 좋겠다.

 

코로나가 다시는 싹트지 못하도록 말이다.

 

 

 

 

천왕봉 오르는 마지막 계단길.

 

다들 힘들지만 입은 더욱더 크게 벌어진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천상의 세계 때문이다.

 

적어도 이 땅에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장면도 없지 않은가

 

 

 

 

구름에 휘감긴 천왕봉.

이때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한다.

 

풍경은 보지 못해도

이미 머릿속 회로엔 풍경이 가득하다.

 

 

 

 

 

 

 

 

 

태양인.

 

내 체질이다.

 

나는 전기장판을 싫어한다. 더워서 잠을 못 잔다. 보일러도 약하게 튼다.

 

체질이 더운탓이기 때문인데, 하지만 음식은 뜨거운 걸 좋아한다.

펄펄 끓는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즐기는 체질.

 

열이 많아 뜨거운 심장을 가진 탓에 역마살이 돋았나 보다.

 

천왕봉을 넘는데 추운 줄 모르고 넘었다.

덧장갑까지 끼고 손이 시린 동료를 볼 땐 내가 열이 많구나 느낄 정도다.

 

나는 얇은 장갑을 끼고도 손이 시린 줄 모르고

칼바람의 천왕봉을 넘고 거기서 맨손으로 사진을 찍었으니 말이다.

 

 

 

 

 

역마살 달인이자 가녀린 찍사

 

 

 

 

 

칼바람은 천왕봉을 넘으니 곧 잔잔해진다.

 

시원한 지리산.

 

안개에 가린 제석봉 사면의 아득한 풍경은 드러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더니

이윽고 안개로 가려버린다.

 

 

 

 

 

그래도 칼바람은 블리자드 같이 찬바람을 몰고 오기에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

 

예전 덕유산 중봉을 넘을 때, 울면서 도망치듯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추웠는지 상상이 안 갈 정도다.

 

치밭목 민 대장은 오브트라우저 장갑이 배낭에 있어도

그걸 끼어 보기도 전에 얼어 뒤진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겪어 보면 그게 사실이다. 

다행히 오늘은 지리산이 얌전해 산행하기에 시원(?)한 날.

 

 

 

 

 

 

 

 

통천문까지 내려오니

이젠 키 큰 구상나무가 더욱 거대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이 곳 풍경은

구상나무가 즐비하고 야광나무와 사스래나무들이 많아 눈꽃을 인 풍경이

마치 겨울왕국 마냥 웅장한 맛을 느끼는 곳이다.

 

 

 

 

통천문
통천문

 

 

구상나무에 눈꽃이 쌓였다.

 

 

야광나무
사스래나무

 

 

 

혹한의 제석봉에 도착하니

생각나는 건 야영이다.

 

제석당 근처 터 좋은 곳에 함박눈이 쌓였을 터.

인근 향적대도 아마 지금쯤 최고의 정서를 보여주지 않을까 싶다.

 

서늘한 겨울의 서정을 그대로 누려볼 수 있는 최고의 야영터.

 

조은산님이 계셨으면 당장 가자고 했을 터인데 

추억이 새록새록, 그리움으로 지펴진다.

 

하지만 풍경 즐기기 전, 얼어 죽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을 천왕봉의 겨울.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혹한의 제석봉

 

 

 

코로나로 문을 닫은 대피소.

언제 개방이 될진 모르겠지만

 

대피소가 운영을 안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당일치기로만 산행 계획을 꾸려야 하니 높디높고 거칠디 거친 지리산을

온전히 당일로만 내닫기론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닐 터이다.

 

 

 

 

 

장터목대피소

 

 

지구온난화 속 지리산, 지금처럼 또 폭설이 올진 장담하기 힘들다.

작년에도 사실 그랬다.

 

내내 기다리다 2월에나 눈꽃 구경을 했기 때문인데

예전처럼 산행 중 만나는 폭설이나, 함박눈 맞으며 지리산을 탐닉하듯 시절은

옛 추억이 되어버릴 정도로 요즘엔 눈이 줄었다.

 

 

 

 

눈은 무릅까지 심지어 허리까지 빠지더라

 

 

 

오지게 밟고 온 눈.

그리고 실컷 본 눈꽃.

 

올해 첫 지리산 산행,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을 잔뜩 휘날리며

흡족 웃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외친 그날이었다.

 

추신: 코로나도 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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