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규의 산과야생화

산행기/백패킹

웅석봉 팩패킹

구상나무향기 2021. 6. 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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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라제네카 1차 접종

 

 

 

코로나의 엄중한 시기, 드디어 이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나 역시 연령별 접종시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운 좋게 1차 접종을 하게 되었다.

 

끈질긴 승부사, 마라톤 정신이 발휘된 순간.

 

무려 21군데의 병원에 일일이 전화하여 잔여백신과 노쇼 예약을 해놨는데

결론적으로 3군데에서 연락을 받았다.

 

잔여백신 어플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 이전에 전화로 예약을 해놨기에

순서가 빨랐다.

 

집단 접종 시작한 당일에 바로 연락이 온 것.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진 생각도 못했다. 

 

움켜쥔 타이레놀, 긴장했지만 사실상 무증상이었다.

 

"뭐야 이거 물백신 아냐"라는 의문이 들 정도

하도 백신에 대한 호들갑이 난무했기에 약간 긴장했지만 그 긴장 조차도 무색할 정도다.

 

3일 정도는 푹 쉬고 힘든 일 하지 말라 했지만 말 듣는 인간이 아니다.

48시간이 되기 전, 나는 지리산 백패킹을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제 나는 코로나로부터 탈출하는 거야"

 

 

 

 

 

말 지지리도 안듣는 어설픈 산꾼

 

 

 

"중봉골로 가보렵니다"

며칠 전, 객꾼 형님의 중봉골 유혹질에 사뭇 동화되었다.

 

사실 중봉골 오른 지도 오래되었고

그 깊은 계곡의 서정이 그리워 중봉골로 가닥을 잡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백신 접종이 이루어진 것이다.

 

백신 핑계로 컨디션 조절차 코스를 변경했고(feat. 사실 더 쉬운데로 갈려는 꼼수)

그나마 만만하 게 보인 웅석봉으로 결정.

 

사실 컨디션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나름 '내면의 농띠'가 기승을 부린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결론적 측면으로 보면 중봉골로 올라도 무방했거니와

웅석봉을 얕잡아 본 탓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아이고 씨부럴"

 

박 짐 짊어지고 웅석봉 오르면서 나는 게거품을 물었고

 

군 시절 유격 훈련 때 겪은 사지 분리 근육통이

다시 생각나는 그때였다.

 

내가 오른 골짜기는 하필 악명이 자자한 곰골이었다.

 

 

 

웅석봉 샘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네발로 기어 간신히 도착한 웅석봉 헬기장.

 

지척의 웅석봉 샘.

물은 콸콸 쏟아지고 청량하다.

벌컥벌컥 그동안 짜낸 땀방울만큼 보충하니 그제야 정신이 든다.

 

샘터에서 정상까진 불과 지척.

 

한낮이라 아직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전혀 생각지 못한 테크가 보이는 게 아닌가.

 

"뭐야 테크네 이거 언제 설치한 거야"

 

 

 

 

 

 

어설픈 산꾼

 

 

 

테크는 정상 양 옆 두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데

사실 나는 전혀 모르고 올랐기에 사뭇 반가웠다.

 

웅석봉은 샘터 근처 풀밭에 피칭하는 게 일반적이라 여겼는데

천왕봉 능선 구비구비 조망되는 최고의 터에서 하룻밤 잘 수 있다니

 

뜬금없는 낭만에 저어기 행복했었다.

 

테크 설치된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참 오랜만에 웅석봉에 오른 모양이다.

 

 

 

웅석봉 정상 테크

 

 

 

5월 말, 한낮의 웅석봉.

뜨겁기 그지없어 잠시 그늘로 피해 오수를 취해 보지만 

 

술도 먹지 않는 재미없는 산꾼이기에 멍 때리며 지리산만 하염없이 바라본 시간.

 

머리가 나쁘면

팔다리가 평생 고생이라는 조상의 고견을 금과옥조로 삼고 살아온 본인.

 

팔다리가 성한 곳이 없고

욱신욱신 생채기 투성이다.

 

 

 

웅석봉 정상

 

 

멍하니 바라본 지리산의 모습.

구비구비 산그리매가 어디가 어디인지 "저 봉우리가 저기냐" 늬적대지만

 

그래봐야 그게 뭔 소용인가. 봉우리 이름 몇개 알아 맞춘다고 누가 알아주겠냐 만은

그냥 중얼거릴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는 궁금증이 든다.

 

"왜 웅석봉이지?"

 

웅석산으로 해도 될 것인데 말이다. 대게 봉우리는 산 아래의 개념.

산이 있고 봉우리는 거기에 속하는 데 독립된 웅석봉이 왜 산으로 부르지 않고 봉으로 남았을까?

 

요즘 산악회 등지에서 봉인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산'으로 이름 지어 정상석을

세운 작태가 많기에 괜시리 드는 의문이다.

 

아마도 웅석봉을 지리산이라는 전체의 개념에 넣어

지리산 아래 모두 봉으로 통칭하여 부른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천왕봉도 봉이지 않는가.

 

웅석봉도 지리산 아래 봉우리라면

"그럼 여기도 국립공원이잖아"

 

 

 

 

웅석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능선. 천왕봉이 아스라하다.

 

 

 

피칭하고 나름 시간이 지나도

해는 늬역늬역 서산으로 떨어질줄 모른다.

 

산아래 산청읍의 풍경이 아스라하게 드러나고

곳곳의 봉우리들이 미세먼지 없이 맑은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내는 천혜의 풍경이다.

 

예전에는 당연 시 되었던 그런 풍경들이

이젠 보기가 힘들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작금이다.

 

미세먼지가 온 세상을 가리는 날들이 지속되니

이런 맑고 쾌청한 산야의 모습을 본지가 언제인가 싶다.

 

코로나까지 덮쳐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수다 떨며 술 한 잔 즐기던

낭만도 사라졌으니 그땐 그게 당연했는데 말이다.

 

그 당연한 일상의 소중함.

우린 값진 교훈을 코로나로부터 얻은 셈이다.

 

 

 

 

 

 

텐트 뒤로 지리산 산그리매가 아늑하다.

 

맑고 청명한 지리산 아래.

 

이런 곳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일도 하고 싶지 않다.

 

 

 

텐트 뒤로 보이는 지리산

 

웅석봉 아래 테크

 

 

드디어 서산으로 떨어지는 낙조의 서정.

 

다소는 빛이 산란되어 흩어졌지만

반야봉에서 보는 낙조의 감명 만큼이나 산꾼의 가슴을 적시기엔 충분한 보상이다.

 

웅석봉 테크는

일몰과 일출을 다 느껴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

 

 

 

 

 

 

낙조의 모습.

 

해는 천천히 천천히 서산으로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고

성질 급한 산꾼의 머리속은 밥하고 삼겹살 꾸울 생각으로 부산해진다.

 

산에 오면 왜이리 빨리 배가 고파 지는 지.

흑돼지의 노릇한 남의 살, 곰골에서 따온 취나물의 향기에 식사 시간은 

금새 끝이 난다.

 

 

 

 

 

 

즐겨보자!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은 

어렵고 험한 곳에 걸리는 게 아니다.

 

이곳 어디매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번 주는 영남알프스 천황산의 산정에 저저번 주는 신불산의 자락과 그 전에는 화엄벌에 

걸렸었다.

 

나의 이상향,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은

내가 행복하고 내가 동경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 

 

나는 오늘도 그것을 걸고 또 자랑한다. 

머리가 나빠도 팔다리가 부지런하면 그래도 사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어두워진 지리산

 

 

이젠 뭐할까?

 

술꾼들이야 술을 마시지만

나같이 아무런 재미가 없는 사람들은 이 시간이 가장 무료하지만 편안한 시간이다.

 

나는 일찍 잔다.

 

집에서도 산에서도 바깥에서도

나는 잘잔다.

 

부스럭 부스럭 아마도 족제비나 오소리였을 것이다.

밤새 그놈도 자지 않고 내 곁에서 함께했었다. 밤에 멧토끼 한 마리가 정상석에 앉았었다.

 

 

 

 

저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새벽 5시.

눞자 마자 아마도 잠을 잤을 것이다.

 

일출 보기 위해 본능적으로 눈을 떴고 

그제야 산야를 보니

 

지리산은 밤새 바람 한점 없이 구름 하나 없이 그렇게 맑고 시린 풍경을 간진한 채

그대로 아침을 맞이했었다.

 

나무 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은

고요한 지리산.

 

이런 지리산의 모습을 본 지가 언제인가.

그날, 참으로 날 한 번 제대로 잡은

백패킹의 시간이었음이다.

 

 

 

여명의 지리산

 

 

부지불식간 저 멀리 붉은 빛이 소의 혀처럼 드리운다.

바야흐로 일출의 시작.

 

잔잔한 지리산에 붉디 붉은 태양이 서서히 고개를 내미니

확연한 밝음과 청명함이 비춘다.

 

주위로 온갖 산새들이 지절대며

여명을 맞이하고 태양은 붉게 솟는다.

 

 

 

일출

 

 

 

 

며칠 전 천황산에서도 일출을 보았지만

요즘 백패킹을 나선 날이면 뜻밖에 일출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항상 흐리고 볼품 없는 일출만이 덩그러니 카메라에 남았는데

오늘 제대로된 웅석봉 일출을 기록할 수 있었다.

 

 

 

 

 

 

 

 

 

 

중봉골을 대신해서 선택한 웅석봉.

최고의 명당에서 필설불구의 대서사를 경험한 훌륭한 낭만의 시간이 아니였나 싶다.

늘 그렇치만 

나는 고민할 것이고 나는 떠날 것이다.

 

후회도 반복할 것이고 선택도 반복할 것이다.

 

 

 

하산하면서 바라본 웅석봉 자락. 그 아래 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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