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규의 산과야생화

군시절(해군병 342기)

해군 군시절 모습-3(해군병 342기)

구상나무향기 2020. 8. 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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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충북함 황천 항해 장면.

 

 

대기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전방 경비 중 유류 수급을 위해 잠시 입항했던 충북함.

그때 승선할 수 있었다.

 

실백 메고 잔뜩 긴장해서 부두를 뛰어서 들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비로소 이등병 시절이 시작되었고 나는 충북함 승조원이 되었다.

 

충북함에 타자마자 함은 바로 출동을 나갔고

그 후 전방 경비가 끝나자마자 충북함은 진해로 수리하러 곧장 내려와 버렸다.

 

동해에 발령을 받았지만 나의 이등병 시절은 정작 진해에서 시작했고

일병 달고 휴가 나간 후 다시 귀대하기 싫었던 진해의 흔적들이 가득했었다.

 

 

 

이제 힘든일 시작, 일병 시절

 

 

 

함에선 물이 정말 귀했다.

그래서 물 한 바가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았는데

 

이때 얻은 습관이 지금도 이어져 나는 늘 물을 아끼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물 한 바가지 뜨놓고 일단 세면과 양치질을 한다.

그리고 그 물에 발을 씻고 그 물로 양말을 빤다.

 

그렇게 두어 바가지 정도면 온몸 샤워까지 마무리되는데

겨울엔 온수가 없어 찬물로 샤워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일병 시절, 부산 3함대 방문 때, 뒤에 보이는 건 신선대 부두다.

 

 

 

 

나의 임무는 조타병으로

함교를 관리하고 기류와 발광, 수기 신호를 전문적으로 하는 임무였지만

 

실제로는 발광 신호 몇 번 해본 게 전부이고

대부분은 함교와 신호갑판 관리, 그리고 기류와 태극기를 마스트에 올리고 내리는 게 주 임무였다.

 

병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라는 게 사실 막일과 뺑끼칠과 깡깡이

그리고 입항할 때 서치라이트 비추고 만함식 때 마스트 꼭대기에 올라가 기류를 다는 것이었다.

 

조타라는 직별 답게 타를 잡는 건 일상이었다.

 

 

 

 

신호갑판에서 조타병과 조타하사들과 함께. 뒤에 보이는 게 기류들이다. 좌.우측 40장씩 들어있다.

 

 

 

조타병이 근무하는 곳은 함교조타실이다.

함장을 비롯하여 모든 최고위층 장교들이 이곳에서 지휘를 하는 곳.

 

파도 치면 엄청 흔들리지만 

그래도 최상층부라 멀미는 덜했던 곳이다. 배멀미는 배 앞부분 실내에서 울렁거릴 때 가장 심하다.

 

항해 당직이 시작되면 갑판병들이 올라와 저 타를 잡았고

입,출항과 전투배치 시엔 조타하사가 타를 잡았다.

 

조타병은 신호갑판에서 기류 신호를 보내거나

발광 신호를 아군에게 보내는 임무 그리고 상황 전달을 함내 아나운싱으로 하는 게 임무였었다.

 

나는 함내 아나운싱과 조타 일지를 작성했고

함교와 신호갑판을 관리했었다.

 

항해당직은 3교대였다. 

 

 

 

실제 함교 조타실 장면. 저 두 명은 대구함 승조원이었는데 폐선되면서 충북함으로 왔었다. 왼쪽 나팔수와 조타병 동기와 우측이 본인

 

실제 DD915 충북함 조타실 장면. 내가 3년 군생활을 보낸 곳이다.

 

 

군함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울릉도 독도는 기본

포항과 진해, 부산 그리고 교차 근무로 서해까지 갔었다.

 

함을 잘 만나면 해사 생도를 태우고 전 세계를 누비는 행운도 있었는데

그때 당시 신형 구축함 FFK가 그 역할을 했기에 언감생심 이런 구식함의 승조원은 그들을 부러워했었다.

 

남들 다 하는 군 시절에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이란 게 얼마나

큰 추억이겠는가.

 

조타병 동기 중 해사 생도를 태우고 해외 원양 훈련을 두 번이나 다녀온 동기가 있었는데

아버지 빽으로 FFK에 갔었다.

 

그놈은 제대 말년에 원양 훈련을 한 번 더 가는 바람에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제대를 했었다.

 

 

 

 

 

포항 팀스프리트 훈련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사실 배멀미였다. 구타도 얼차려도 아닌 배멀미.

해군은 이게 가장 힘들다.

 

하루 종일 파도와 싸우며 멀미에 시달려 보라

내가 가장 해군에 들어온 걸 후회할 때가 바로 그때였었다.

 

늘 황천주의보가 기본이었던 동해, 파도는 일상이었다.

 

 

 

충북함 항천 항해 장면

 

황천 항해, 실제 이렇게 항해을 한다. 배멀미는 옵션.

 

 

 

무시무시했던 군 시절.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얼차례와 매타작이 있었지만 그래도 시계는 돌고 돌아 병장을 달았고 

제대는 목전에 다가왔다.

 

그 많았던 선임들을 한명 한명 보내고 나니 나도 순서가 돌아 오더라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메달아도 돌아 간다고 하더니

그렇게 바다에서 보낸 시간은 흘러 흘렀다.

 

 

 

 

신호갑판 발광신호기 앞에서.

 

 

하푼 미사일

 

어뢰

 

 

 

 

작전부 침실.

예전 진해에서 함 개방 행사가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진해 방문했었는데

 

이 침실에 들어오고 나서

너무 좁은 침대를 보고서는 울고 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뭐 그때는 그게 좁았는지 모르겠고

밤이 되면 쥐가 나타나 설치곤 했었다.

 

그래도 겨울엔 난방 하나는 끝내주게 잘되어 군시절 내내 추웠던 적은 없었다.

한겨울에도 너무 더워 벗고 바닥에 누워 자기도 했었다.

 

늘 상 바다에 뜨있고 육지에 와도 배안에 있다 보니 더운지도 모르고

여름을 보냈다.

 

눈 오면 겨울이구나 여겼고

더우면 여름이구나 싶었다. 세상일은 모두 단절이었다.

 

해군은 바다에 뜨있기 때문에 세상일은 깜깜이었고

편지를 몇 개월에 걸쳐 받기도 했었다.

 

진해에 머물다 동해로 움직이는 게 늘 반복되었기 때문에

내 편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순 없었다.

 

심지어 바다에 나가면 가족 경조사 조차 알 수가 없는데

입항해 그제야 가족의 부음을 듣고 급히 나가는 병사도 있었다.

 

 

 

 

작전부 침실. 거의 제대 말년 시절. 제대를 3월 10일에 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저 문은 닫고 해치 구멍으로만 출입하는데

군시절 동안 실전 전투배치를 붙은 적이 서너 번 있었다.

 

대부분 전방 경비 임무 중 발생했는데 북한군 도발이나 아님 잠수함 출몰 때 했었다.

그땐 정말 긴장했지만 대부분 별탈 없이 마무리됐었다.

 

정말 한 번은 심각하 게 전투배치를 붙은 적도 있었다.

9인치 포대에 포탄까지 장전하고 20mm 발칸포까지 준비했으며 육지에서 해상 초계기까지 발진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마 북한 군함의 NLL 해상 도발이었을 것이다. 늘 그랬기 때문이다.

 

일본 순시선 출몰은 다반사였고

독도 인근에 우리가 다가가면 슬며시 도망가 버려 늘 작전은 그런 식으로 마무리됐었다.

 

일본 순시선 때문에 전투배치 붙은 적은 없었다.

잠시 선을 넘었다가 우리가 다가 가면 늘 경계선 바깥으로 넘어갔었다.

 

 

 

작전부 침실

 

후임과 함께. 아마 전탐병이었을 것이다.

 

 

 

 

동해에 접안한 어느 날

 

엄청 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

50cm 정도의 적설량이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다. 

 

눈이 오면 함은 제설 작업을 바닷물로 하는데 함에 붙은 아프리게이터를 통해 바닷물을 분사시켜서

눈을 씻어낸다.

 

그런 다음 민물로 다시 씻어내야 하는데 이게 정말 죽을 맛이다.

 

이등병에서 하사까지 열외 없이 동원되는데

장갑 따윈 없고 오로지 맨손으로 그 추운 겨울날 수건으로 물을 다 닦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숨거나 딴짓하다 걸리면 영락 없이 얼차려 감이었고

제대 말년 병장도 열외가  안 될 만큼 함에서는 중요한 임무였었다.

 

출동 나가고 접안해도 함에 묻은 바닷물을

민물로 씻어내는데 이게 사실 힘든 노역 중 하나였었다.

 

 

 

 

엄청나 게 눈 내린 날

 

 

9인치 포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는데

이게 정확도는 떨어져도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었다.

 

컴퓨터로 조작되는 첨단 포들의 각축장의 현대전이지만

전적으로 사람의 감과 촉으로 작동했던 옛날 방식의 포.

 

포술장의 능력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특히 해병대 상륙 작전에선 이 9인치 포의 위력만큼 탁월한 게 없었다.

 

실제 해병대 상륙 훈련 시 우린 후방에서 9인치 포 지원 사격 훈련도 병행했었다.

정확도는 떨어져도 파괴력이 어마어마했기에 무작정 쏘아대는 상륙 지원엔 최적이었다.

 

 

 

 

후미 쌍대포, 어마무시한 위력의 9인치 쌍대포.

 

 

저 9인치 쌍대포 사격 훈련이 있을 땐

귀를 막아도 고막이 터질듯한 굉음이 났었다.

 

함교에 근무했기에 쌍대포의 굉음을 가장 근접에서 들을 위치였었다.

 

졸병 시절 귀를 막으면 군기 빠졌다고 맞을 시절인지라

사격 훈련이 있을 땐 정말 긴장했었다. 저 굉음은 엄청났었다.

 

함수엔 쌍대포가 위. 아래

함미엔 쌍대포가 헬기갑판 아래. 총 3개가 있었는데

 

세 개를 동시에 사격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함이 덜석거렸기 때문이다.

 

 

 

 

함미 9인치 쌍대포.

 

 

전탐하사와 조타하사들과 함께

 

 

그렇게 세월은 흘러 제대를 했었고

근 30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가끔씩 군시절 꿈을 꾼다.

 

91년 8월 5일부터

94년 3월14일까지

 

31개월 15일 동안의 군시절, 그때 그추억을 블로거에 남긴다.

 

 

 

 

함수 쌍대포에서 친구 류상백과 함께. 우측이 그 당시에 신형 구축함 FFK

 

 

나는 대한민국 해군이었고

나는 대한민국의 국군이었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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