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조암에 이르니 귀룽나무 꽃이 절정이다.
순수 우리말 구름나무가 한자로 차용하면서 구룡목이 되었다는 말도 있는데
귀룽은 귀신이 놀래서 달아나 게 한다는 뜻
그래서 대문 앞이나 궁궐 등에 실제로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적조암에 가득 심어놨는데
이곳에 귀신이 많아 그런 것일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봤다.
노장대까지 이어진 골짜기, 즉 노장대골은 순하디 순한 골이다.
예전 이 골짜기에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옛 터만 남았다.
사람이 살아간 터에는 일단 나물이 많다.
풀솜대, 원추리, 금낭화, 취나물, 참당귀,어수리 등
모두 자생식물이지만 구황작물로 별도로 키웠기 때문인데
사람은 떠났지만 그때 남은 작물이 터를 잠식하고 번성하고 있기에
그래서 나물 많은 곳을 찾으려면 예전 사람이 살은 곳을
찾으면 손쉽다.
풀솜대는 지장보살이라고도 달리 부르는데
지장보살의 덕을 가진 나물이라는 뜻.
보릿고개에 사람들의 배를 채워줬다해서 '지장보살'이라 했다고 한다.
얼마나 고마웠으면 '지장보살'의 덕행에 비유했을까
그래서 먹어봤다. 얼마나 맛이 좋기에 지장보살에 비유했을까?
와우!
내가 아는 어떤 나물보다 으뜸, 가히 나물계의 제왕이다.
달고 부드럽고 풀향까지 아스라하다.
이런 나물이라니 먹을 게 없을 시절에 이 정도의 풍미라면 지장보살 아니라 부처님이라고
불러도 될만하다.
지리산 고산지대의 나물 중 귀한 어리병풍, 어수리, 서덜취, 곰취가 생각나기는 하지만
사실 쓰다.
야생 나물은 쓴맛이 강하기에 풍미를 자랑하기는 곤란한데
그것도 개체수가 그리 많지도 않다.
풀솜대는 다르다. 지리산에서 아마 이만한 나물도 딱히 없을 듯.
개체수도 많고 풍미 또한 매우 뛰어나다.
노장대골에 이르니 금낭화 밭이 장관이다.
금낭화는 며눌취라는 나물로도 사용하는데 실제 덕산의 한 나물 뷔페에서
금낭화 나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금낭화는
약간 누린 맛이 나기도 하며, 풀향이 가득한 야생의 나물.
금낭화는 중국에서 들여온 식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국내 야생에 적응하여 이젠 숲의 곳곳에서 야생화되어 자생식물 반열에 오른 식물.
금낭화 역시 나물로 활용하기 위해
원추리와 더불어 구황작물로 터 곳곳에 심은 대표적 식물.
사람은 떠나고 금낭화가 숲을 잠식하고 있다.
"아니 도대체 돌배나무는 어디 있는 거야?"
사실 노장대골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돌배나무 때문이다.
딱 지금이 돌배나무가 꽃을 피울 시기. 수백 년 묵은 돌배나무가 신령스럽게 자라고 있기에
그 꽃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몇 해 전, 이 돌배나무를 보고서는 그 규모와 신령스러움에 반했든 기억이 있어
마침 개화시기에 맞춰 산속에서 보는 돌배나무 꽃의 장관을 목도하리란
열망으로 이곳을 찾은 이유다.
하지만 기억이 어슴프레, 머릿속 지우개가 싹 지웠는지
나는 이 돌배나무가 마을 입구에 있었다고 여겼다.
가도 가도 나타나지 않자
혹여 지나갔나 했을 정도. 그렇다고 이 큰 고목을 못 보고 지나갔을 이유는 없고
바로 머리 위에 노장대가 위압적으로
보이는 곳, 노장대동
가다가다 보니 노장대동 마을까지 갔어야 나타난 게 아닌가
그제야 아둔한 머리를 탁 쳤다.
"아 맞다 여기에 자라고 있었지"
노장대골 가장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신령한 나무.
이른바 노장대동 돌배나무다.
산돌배나무와 돌배나무가 있지만
사실 돌배나무가 원조이고 산돌배나무는 교잡종이 많아 되려 산아래 마을에 많이 키운다.
오래된 지리산 산만디에 자라는 고목이라면
아마도 교잡이 이루어지기 전 돌배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의아한 일.
꽃을 피우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잎보다 꽃을 더 빨리 피우는 돌배나무.
그러나 기대와 달리 꽃은 없고
잎만 틔우고 있는 게 아닌가.
산아래 마을에 화사하게 흰꽃을 잔뜩 달고 있는 돌배나무들에
비하면 참으로 의아한 일.
근접 촬영해봤지만
역시 꽃봉오리는 안 보이고 잎만 보인다.
이건 일반적인 돌배나무의 특성이 무시된 상황.
화사한 흰색의 꽃들이 잔뜩 피어나야 하는데
이 돌배나무는 꽃 피우는 걸 건너 뛰고있었다.
노장대동 돌배나무 자료를 뒤져봤지만
이 나무가 꽃을 피운 적이 딱히 없는 모양이다.
혹여 이 나무가 꽃을 피운 경우를 본 적이 있는 분이 계실까?
깊은 숲 속에 자라면서
더 이상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생각을 이젠 나무 스스로가 잊어버린 것일까?
나무도 생각하는 존재라고 하는데
번식할 이유를 찾지 못해 스스로 봉인한 게 아닌가 싶다.
화사한 꽃을 보리란 기대는 하릴없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 산행의 재미가 사라진 건 아니다.
봄의 화사한 기운이 깃든 노장대골.
순한 골짜기를 따라 이곳에서 봄의 선물을 잔뜩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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