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못한 뜬금없는 휴가가 주어졌다.
휴가라면 의례 물 건너가는 걸 기본 개념으로 잡았든 지난 세월.
이번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휴가를 즐기고자 가닥을 잡았는데
바로 지리산.
사실 물 건너갈까 고민을 거듭하다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었다.
"귀찮다"
그랬다. 이젠 비행기 타고 나다니는 것도 지겹고
해본 것에 대한 만족감이 이젠 어느 정도 차 있을 시점이라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갈망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게 정답이리라
뭘 그리 나가봤다고 하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 나이 숫자만큼이나 쏘다녔으면
이젠 좀 지겨울 만도 하지 않으리라 싶기도 하다.
스스로의 당위성에
빠진 결과물이 역시나 지리산.
사실 귀찮니즘의 결과물이 지리산이라고 해도
오래간만에 찾은 지리산, 반갑기 그지없었다.
장소의 가닥을 잡아보니 중봉과 연결되는 동부능선이 꼽힌다.
에너지 소모를 쫘악 뺄 수 있는 힘든 코스.
늦여름의 야생화를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비박할 수있는 영랑대와 중봉이 있기에 선택.
하지만 혹시 몰라 보험으로 치밭목대피소 예약을 하고 갔었는데
폭염 속 지리산은 만만찮은 여정을 보여주었고
어중간하 게 올라버린 중봉에서의 하릴없는 시간 죽이기가 나에겐 어려운 숙제로
다가왔었다.
결과론적 측면으로 치밭목 대피소 예약은 매우 주요한 결과였었다.
조개골과 동부능선이 오랜만은 아니였지만
청이당에서 이어지는 하봉과 중봉 그리고 치밭목으로 내려가는 써레봉 코스는
정말 오랜만에 찾았기에 그 감회도 남달랐다.
길이 상당히 묵었고 구상나무와 일부 야생화의 생태가 바뀌어 있어
세월이 흐른 것에 대한 짙은 감성을 토로했었다.
조개골에 슬쩍 발을 담그니 곧 익숙한 풍경이 드러난다.
입구에서 30여분 정도 걸으면 우량탑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흔히 철모삼거리라 하지만 그 철모 떨어진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여기서 우측으로 턴하면 바로 동부능선.
한갓지고 조용하다.
오늘 이 장소엔 나만 있는 듯 너무나도 고요한 순간.
간간히 바람 소리와 사물이 내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 한가닥 소음이 될 뿐.
폭염 속 열기, 뿜어내는 땀과 가쁜 숨이 어느 정도 진정할 즈음에
나타나는 청이당터.
청이당터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마암으로 가는 옛길이 나온다.
마암 가는 길, 지난겨울 길 찾는데 제법 어려웠든 기억이 있어,
잡목이 부여잡을 이 시기엔 안 가는 게 나을 듯. 국골사거리 방향으로 향한 이유다.
나름 아이큐 99가 생각해 낸 최선의 선택.
청이당터, 하봉능선 구간 비박하려면 물을 확보할 수 곳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물을 가득 담았다 그래봐야 날진 1L 물병이 전부.
추가 물병을 깜빡 잊고 넣질 않았는데
이게 실수였었다.
하봉 일대 영랑대 부근, 구상나무의 고사목들이 가득하다.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가문비나무, 구상나무는 이제 더 이상 지리산에서 살아남기 힘든 시기다.
이유가 뭘까?
기후변화로 이 모든 현상을 다 퉁쳐서 말할 수 있을까?
일단 확실하 게 알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강수량의 변화
무엇보다 기온의 상승이 이 구상나무들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침엽수는 일단 강수량이 많으면 살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겨울이 길고 강수량이 적은 우리나라에 많이 서식했지만
추운 날 보다 기온은 따뜻해지고 강수량이 많아지니
침엽수는 자라기 어렵게 된 것.
침엽수가 열대지방에 서식하는 경우가 없듯이
침엽수는 기온이 상승하면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그래도 능선에 오르면 시원할 거란 생각을 했는데
푹푹 찌는 열기, 숲에서도 이 폭염은 피하기 어려웠었다.
해 떨어지면 시원하겠지라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오후 4시의 지리산은 더욱 기운만이 가득했었다.,
예상되는 식수 확보 장소,
하봉헬기장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하고 중봉에서도 중봉 샘의 물이 확보되리란
보장은 없었기에 결국 치밭목대피소로 내려간 이유가 사실 물 때문.
물만 더 확보했으면 좋으련만 역시 아이큐 99의 한계치에서 그날
고행을 했더랬다.
무엇보다 물 뜨는 것도 귀찮았기에 선택한 결과.
하봉 샘으로 내려가는 길목도 워낙 잡목에 막혀있어 뚫고 내려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잡목이 우거졌다니"
예전과 다른 식생에 사실 깜짝 놀랐다.
정말이지 요즘엔 사람이 많이 다니질 않는 모양이다.
반질반질했던 지리산이 아닌 걸 요새 실감한다.
일견 동부능선만 그런 건 아니다. 다른 코스들에도 이젠 등산로가 제법 묵어 직관으로 다니긴
어려워졌다.
잡목이 우거질 계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예전에 비해 등산 인구가 줄어든 느낌.
세월이 흐르면서 길이 더욱 반질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되려 정반대 현상. 길은 묵어지고 잡목은 우거져 눈앞의 등산로가 보이질 않는다.
오후 4시 30분, 중봉에 도착했다.
윗새재에서 출발한 지 5시간 30분 만에 도착.
애초 계획한 중봉 비박할 생각은 바로 접었다.
열기 가득한 중봉.
해가 떨어질 때까지 최소한 2시간은 기다려야 했고 물까지 부족.
지쳐 힘들었지만, 치밭목으로 내려가기로 결정.
중봉샘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이미 말라있을 거라 예상했었다.
중봉에서 또 폰을 주웠다.
예전에도 중봉에서 폰을 주웠는데 이번에도 또 습득.
이 폰은 대피소에 전달했었다.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었기에 언제 떨어졌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내가 오른 시기가 평일이었기에 중봉을 지나간 사람들이 별로 없었나 보다.
산속에서 폰 주운 게 2번.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기사 나는 홀인원을 2번이나 목격한 동반자다. 평생 홀인원 하기도 힘들지만
그걸 두 번이나 본 사람도 쉽지 않을 터.
이게 운인지 아닌지?
써레봉을 지나니 허벅지에 텐션이 가득하다.
오늘 이 구간의 코스가 쉬운 코스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흘린 땀으로 전해질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폭염 속 마라톤을 할 때는 정제 소금을 꼭 챙기는데
오늘 소금을 챙기지 못한 탓.
이럴 때 물을 마셔도 헛구역질이 난다.
반드시 소금을 먹거나 포카리스웨트 같은 음료수를 마셔야 하기에
더운 여름엔 필수 챙길거리다.
황금능선 들머리를 지나니 그제야 좀 내리막 구간이 좀 수월해진다.
중봉에서 써레봉까지는 내리막이 다소 급하기 때문에
이 구간 쉬운 코스가 아니다.
중봉에서 정확히 1시간 30분 걸렸고
출발한 윗새재에서 7시간 30분만에 치밭목대피소에 도착.
정말 힘들었든 그날의 산행.
폭염 속에선 할 게 못된다.
서둘러 자리 배정을 받고
저녁 식사를 마쳤다.
흑돼지와 김치
그리고 햇반 하나.
조촐한 저녁식사였지만 그렇다고 부족할 건 없다.
이제 편안한 잠속으로 빠져들기만 하면 될 일.
그러나 대피소의 악몽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사실 대피소 안이 너무 후덥 했었기에
실내까지 그 열기가 식지 않아 밤새 발버둥을 쳤었다.
안그래도 열이 많은 체질이라 더 발광을 했더랬다.
그러다 결국 바깥에 나와 침낭을 깔았는데
이때 모기에게 얼마나 물어 뜯겼는지 정말 호러 영화를 한편 찍었을 정도.
"지리산 숲이 이렇게 덥고, 뭔 모기가 이리 많아"
한여름에도 재킷을 입고 자야만 했든 지리산.
이젠 그것도 옛말.
무엇보다 이 고산지대에 이렇게 모기가 많다니.
예전에는 모기 걱정은 아예 하지도 않았는데
잠이 드는지 마는지 그렇게
새벽까지 참았지만 다들 마찬가지였나 보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새벽 3시에 다들 자리 박차고 나가는 게 아닌가.
참다 참다 결국 4시에 일어났는데
나 혼자 남았었다.
심밭골은 순한 골짜기라 내가 아주 선호하는 지리산의 길 중 하나다.
단풍이 절정인 어느 나절, 이 심밭골을 이용해 무제치기 폭포 위에 서면
정말 황홀한 지리산의 단풍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
개인적으로 이 풍경을 지리10경 중 하나라 여긴다.
1시간 30분 걸려 윗새재에 도착하니 어제 출발한 바로 그 자리.
윗새재~청이당~중봉~치밭목(1박)~심밭골
조개골로 오르려다 자주 오른 추억이 많아
이번에 오랜만에 동부능선으로 올랐다.
사람 한 명 없이
오롯이 혼자서 다닌 그 시간의 지리산.
최근 직장을 옮기고 거의 강제(?)로 받은 연차 소진에
평일에 찾은 지리산이었다.
.
올해는 이래저래 다양한 심적. 환경 변화를
겪고 있다.
사람 앞날 정말 모른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즈음.
사주팔자가 정말 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어쨌튼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게 그게 이치가 아닌가 싶다.
각자 자기가 갈 길은 나름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저 어느 순간에도 내가 행복하다면
잘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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