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일요일 비가 오지 않네"
비가 온다는 예보에 야영 계획을 취소하려 했었다.
그런데 기상예보는 슬그머니 맑음으로 바뀐 게 아닌가.
'하늘나라 선녀'들의 변덕 탓일까
어쨋던 맑다는 예보에 무작정 야영 짐 짊어지고
"못 먹어도 고"를 외치니
역시나 역마살 달인의 주말은 개고생으로 점철된다.
"어디를 가볼까"
동행자의 컨디션을 살펴보니 가깝고 코스 짧은 곳이라는
동선이 파악된다.
고민을 10분 했을까
예전부터 야영 리스트에 올려놓고 실행하지 못한 장소를 떠올리니
바로 화엄벌이었다.
화엄벌, 대한민국 최대 억새밭인 신불산 평원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억새의 향연을 마주하는 곳이다.
꼭 가을에 가야 억새의 낭만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푸른색 가득한 억새밭의 싱그러움,
여름날 아니면 보지 못할 억새밭의 정취요 낭만 아니겠는가
사실 억새밭 낭만은
이슬방울 동글동글 맺힌 녹색의 정취가 으뜸인 지금이다.
루트는
홍룡사에서 원효암을 거쳐 화엄벌 늪으로 갈 계획을 잡았다.
홍룡사에서 화엄벌 늪으로 가기 위한 루트는 여러 갈래.
홍룡사에서 화엄벌 늪으로 곧장 가는 길.
그리고 원효암 갈림길에서 화엄벌 늪으로 가는 길과
주차장에서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원효암으로 가는 길이 산꾼의 선택을 기다린다.
화엄벌의 억새와 탁 트인 조망을 보고자 산행한다면
원효암을 통하는 구간은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풍경이 단조롭고 특히 옛 군부대 지뢰 지대를 통과하는 사면 길과 오르막 임도는
매우 지루하고 버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영이 목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원효암으로 가야만 하는데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식수 때문이다.
화엄벌 가는 길에 약수터가 있긴 하지만 사실 저 약수터는 전혀 믿을 게 못 되는
산중 암반수.
루트에 따라 물을 확보하는 건 각자의 몫.
화엄벌 근처엔 딱히 샘터나 물을 뜰 곳은 없다.
야영 목적이 아닌 화엄벌의 억새 비경을 보고자 함이면
홍룡사에서 화엄벌로 바로 오르자. 단조로운 원효암 코스는 추천하지 않는다.
홍룡사에선 원효암과 화엄벌 늪 코스는 오르막.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의 짠맛을 느끼며
힘찬 심장의 고동을 즐기며 오르니 어느덧 삼거리에 이른다.
"어 저거 오소리 아냐"
너구리인지 오소리인지
어슬렁 거리며 숲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게 아닌가.
이런 산 중턱에서 보는 동물은 아마도 오소리가 아닌가 싶다. 너구리는
아무래도 야행성이라 밤에 활동하기 때문. 자세히는 나도 모른다.
어쨌든 폰을 끄집어 내니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곤 쏜살같이
숲으로 사라진다.
"수고하십니다"
뚝딱뚝딱 스님 두 분이 뭔가 작업을 하고 계신다.
슬며시 인사치레로 물값을 대신하고 야영을 위해
물병에 물을 가득 담는다.
여기서부터 천성산 정상은 1.5km.
하지만 정상은 지뢰 제거 때문에 통제가 되어 오를 수 없다.
올해 11월 말까지 지뢰 제거 작업을 한다고 하는데
예전엔 그곳이 군부대였었다.
군부대 이전 후 개방했다가 지뢰 제거로 다시 통제되었다.
원효암은 차량으로 올라올 수 있는 곳인데
입구에서 원효암까지 셔틀버스가 다닐 정도다.
원효암까지 올라와 사부 자기 걸어 화엄벌 늪에 서면
불과 30분 남짓한 시간에 텐트를 칠 수 있는 최근접의 장소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토바이 타고 올라와
야영하는 장면도 보았다.
낑낑 거리며 원효암에서
정상으로 오른다.
임도를 따라 그리고 군부대 지뢰 지대 사면 길을 따라서
한참을 넘으니 그제야 오늘 야영 장소인 억새밭이 나온다.
화엄벌 늪 억새 지대는 이곳은 아니지만
이곳은 일출이 보이는 곳.
화엄벌 늪에서 일출을 보려면 정상으로 올라야 하지만
이곳은 텐트 문만 열면 일출을 바로 볼 수 있는 곳, 낙동정맥 능선 구간 해맞이 장소다.
더구나 원효암에서 오르면 이쪽 방향으로 오르기가 편하지
화엄벌 방향은 번거롭다.
천성산 정상에서 2봉 방향 낙동정맥 능선은 화엄벌만큼 더 넓은 장소는 아니지만
야영의 운치로 따지자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텐트 칠 공간이 없어 애매했는데
마침 딱 한 군데 좋은 자리가 나온다.
억새밭의 운취도 좋지만
이곳에선 일출과 일몰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경은 덤으로
볼 수 있기에 화엄벌도 좋지만 이곳 역시 천혜의 야영지다.
이런 곳을 두고 어디에 야영을 하겠는가
즉흥적으로 찾아낸 터지만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었다.
해는 서산으로 뉘역 뉘역 떨어지고 있지만
하지가 곧 지난 요즘, 일몰은 오후 7시 50분이다.
아직 시간이 이르다.
천천히 텐트를 치고 야영의 서정을 느껴본다.
다시 봐도 참으로 괜찮은 야영 터다.
이번에 새로 장만한 포스텐 아르곤 200 시트론 텐트.
주황색의 이너 텐트 그리고 그 위로 연녹색의 플라이를 설치하는 더블월 텐트다.
텐트 뒤로 천성산 1봉의 위용이 보인다. 우측 능선이 화엄벌이다.
저녁을 지어먹고 부산을 떨어도
해는 뉘역 뉘역 참으로 천천히 떨어진다.
구름 때문에 일몰과 일출은 보질 못할 거라 여겼는데
일몰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금 붉게 보이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두런두런, 야영은 여유로움 속 한가함을 즐기는 것.
바쁨과 조급함을 버리려 떠나온 길.
서두를 것도 바쁠 것도 없다.
떨어지는 낙조를 보며
시간을 즐긴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이 시간만큼 좋을 때도 없을 것이다.
이 핑계로 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을터.
하지만 술과 담쌓은 나 같은 꾼들에게
망중한은 조용함을 즐기는 것, 산야에 서서 자연을 즐기는 보람은 가히 설명 불가능이다.
산중에서 느끼는 밤의 서정은 남다르다.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질 않을 듯 하나
별이 보이고 야경이 보이고
그리고 산의 음영이 보인다.
구름이라도 몰려오면 구름 위 낭만까지 부려볼 수 있지만
그날, 구름은 없었다.
양산 쪽 시가지에 불빛이 환하다.
양산 서창, 웅촌 멀리 부산 정관 쪽 야경이 환하게 밝혀준다.
산 능선에서 즐기는 야경이라니
딴은 낭만이다.
이건 스쿠버 다이빙용 수중 렌턴이다.
일반 렌턴과는 빛의 밝기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나는 야영할 때 꼭 이 수중 렌턴을 챙기는데 밝기가 아주 화사해
새벽녘, 잠시 밖에 나올 때 아주 요긴하다. 자동차 라이트 수준이다.
이 수중 렌턴은 배터리 때문에 야영용으로만 사용하고
산행용은 따로 있다.
이런 렌턴 하나만 있어도 주위 웬만한 사물은 다 밝힐 수 있을 정도라
야용 시 매우 유용하다.
"일출이다 일어나라"
한 차례 눈을 뜬 이후로 논스톱으로 숙면을 취한 밤이었다.
야영하면서 잠을 설친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나에겐 언감생심이다.
눈떠 보니 어느덧 붉은 일출이 소 혀처럼 드리운다.
문만 열어도 일출이 환하게 보이니
참으로 근사한 일출 명소임에는 분명하다.
능선 야영의 단점은 하나다.
해가 뜨면 뜨거워져 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것.
부단히 아침을 지어먹고 서둘러 엉덩이를 떨궈야 한다.
역시나 해가 뜨니 금세 뜨거워진다.
그래서 한 여름의 야영은
능선 보단 계곡이 나은 이유다.
오전 5시 10분경 일출, 이때부터 부산하 게 아침을 지어먹고
서둘러 야영지를 정리한다.
머리 위 태양은 지글거리며 어서 가라며
산꾼을 열기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제 불볕더위의 정점에 있을 시기.
아직 조금은 시원할 줄 알았는데 불볕더위는 지금 시작되었다.
천성산 2봉에서 성불암 계곡으로 내려가고자 계획을 했었다.
멀리서 보면 은수고개에서 천성산 2봉으로 오르막을 치고 올라야 할 듯 보이지만
등산로는 완만한 오름세를 이르면서
천성산 2봉으로 부드럽게 이어진다.
어느듯 저멀리 1봉이 아스라하다.
우측으로 희끗희끗 억새밭으로 이어진 능선이 화엄벌이다.
다소 수훨하게 2봉에 오른다.
천성산 2봉, 오른 경험은 제법 되지만
거미줄같이 얽힌 등산로이기에 아차하면 어먼길로 빠지기도 한다.
그날도 집북재를 통해 성불암 계곡으로 가고자 했지만
내원사의 거친 골짜기로 내리막을 타고 말았다.
정상에서 내원사 계곡은 급 내리막으로
이 길은 천성산 등산로중 가장 최악으로 꼽는 등산로.
무거운 박 짐 짊어지고
내리막으로 치달으면 무릅 관절이 삐걱 될 정도다.
올라가도 힘들고
내려가도 힘든 곳, 하필 그 등산로로 내려 올 줄 누가 알았남.
너덜너덜, 무릅에 압막을 가하며
천천히 내려오니 그제야 내원사.
비구니 사찰인 내원사에 뜨거운 여름 햇볕이 걸렸다.
나른한 산중.
스님들의 예불 소리만이 울릴 뿐.
하릴없는 백성은 보따리 짊어지고 잠시간 휴식을 뒤로하고
서둘러 떠난다.
이곳에서 아래쪽 주차장까지 무려 3km의 계곡 옆 도로를
걸어야 한다.
계곡엔 벌써부터 열기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아이들과 정답게 시간을 보내려는 이땅의 부모들이
여기 다 모인듯 왁작지끌하다. 대부분은 젊은 가족들.
아빠 노릇 엄마 노릇, 그것도 쉽지 않다.
오래 전 딸의 어린 시절에도 난 이곳 내원사 계곡에서 여름을 보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는 모양이다.
뜨거운 햇살 아래 그렇게 여름은 시작되었고
그렇게 나의 여름 나절 야영도 끝을 맺었다.
총 14km 남짓.
코스는: 홍룡사~원효암~해맞이장소(야영)~은수고개~천성산2봉~내원사~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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