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떼 산장의 아침>
부스스 눈을 뜨니
아침을 알리는 알람이 뒷북을 울리고 있었다.
전날 고생한 흔적은
허리와 골반 그리고 허벅지의 짜릿한 전율에서 느껴지고 있었는데
기지개를 켜봤더니 온몸이 부들부들이다.
후유증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 갈 정도는 아닌지라 애써 의지를 불태워본다.
<산장의 아침은 대게 이런 빵과 시리얼이다.>
이들의 빵은 딱딱하고 우유나 커피도 다소 밍밍하다.
우리네 입맛과는 좀 차별된다.
내뿐만 아니라 곁의 한국인 몇 분도 입맛이
그닥 내키지 않는 눈치다. 짜거나 달지 않아 부드러운거 좋아하는 분들에게 딱맞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노릇
양껏 먹어 보리라 했지만 생각보다 먹질 못했다.
<세이뉴 고개부터는 이탈리아다>
오늘은 드디어 프랑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한다.
몽블랑트레킹의 매력 중 하나가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세 나라를
한방에 여행하는거다.
살벌한 우리네 국경과 자유 분방한 유럽식 국경의 개념은
잘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늘 드디어 그걸 느껴보는 시간이다.
<세이뉴 고개 가는길>
'꼴드 라 세느' 고갯마루 지명인데, 이게 한국식 발음으로 '꼴데 라 세이뉴'라고
읽히는게 보통이다.
아무래도 영어식 발음이 우리에겐 익숙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 콩글리쉬 발음이긴 했지만, 대부분 불어보단 영어쪽에 의한 '대충 발음'이라
여기면 될터이다.
<세이뉴 고개를 알리는 말뚝>
모떼 산장에서 세이뉴 고개까지 계속 오르막이다.
모떼 산장이 해발 1,874m인데, 세이뉴 고개가 2,516m다.
640m를 치고 올라야 한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몽블랑트레킹중 'col de'라고 붙는 지명은 최소 500~600m 이상 고도를 높여야 하는
고갯마루라고 보면 된다.
그 아래는 그냥 언덕이다. 이름도 없더라
<아침부터 무더웠다>
능선 산행을 하다 보면, 군데군데 빙하가 녹아 흐르는 작은 개천을
만나게 된다.
이 물을 마시는 거에 대한 거부감이 있겠지만,
실상 산장에서 공급하는 물 자체가 바로 이 빙하수 그대로다.
화장실 물이나 식당에서 사용하는 물이나 똑같다.
나는 저렇게 흘러내리는 물을 자주 받아 마셨는데
청량감 하나론 정말 최고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물맛이다.
<빙하가 녹아 작은 개천이 되었다.>
역시 초원지대가 먼저 반긴다.
모떼 산장에서 이탈리아 꾸르마예르 가는 길 전부가 초원지대다.
팀버라인이라 나무는 없고
야생화가 즐비한 전형적인 알프스 코스다.
이 코스(모떼~메종빌)가 몽블랑트레킹 중 가장 손꼽히는 풍경을 선사해준
최고의 코스였다.
풍경과 낭만 그리고 감성까지 묻어나는
알프스 소녀 하이드와 춤이라도 추고픈 바로 그런 코스다.
<뒤돌아본 길>
풍경이 좋아 계속 뒤돌아 본다.
꽃밭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산봉들이 특히나 이채롭다.
파란하늘과 더불어 하얀 설산 풍경은
야생화와 더불어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꽃의 계곡 알프스다.
깊디깊은 빙하의 계곡과 어우러지는 야생화의 멋스러움에
절로 발걸음이 멈추어진다.
지나온 길이다.
막힌 부분이 없기 때문에 내내 이런 풍경을 보면서 걸었다.
알프스 최고의 낭만을
만끽한 하루가 아닌가 싶다.
간간히 토끼인지 너구리인지 정체 모를 동물들을
간혹 만났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듯 도망을 가도 소극적이었다.
*나중에 찾고보니 저놈이 마멋(marmot)이었다.
본 옴므 산장에서 쉴 적, 바위에서 노는 아이벡스(알프스 산양)도 눈에 띄었는데,
나중에 락블랑 산정에 풀어놓은 염소떼도 만났다.
특이한 꿩도 몇 번 목격했었다.
<마멋(영어: marmot), 마르모트(프랑스어: marmotte)>
드디어 세이뉴 고개다.
이곳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이기도 하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서있지도 못하는 곳인데, 그날은 구름도 없고 바람도 한점 없었다.
<세이뉴 고개>
똥폼은 이어진다.
다국적인을 불러세워 무작정 찍어댄 '의례적 똥폼'이기에
딱히 마음에 드는건 없다.
뭐 그래도 이렇게나마 인증샷 찍은게 어딘가
얼굴이 그다지 훈남이 아니기에 의도적이지 않지만 좀 가려보았다.
이탈리아 방향으로 본 세이뉴 고개다.
여권 보자고 하는 사람은 없더라.
내가 서있는 저곳은 이탈리아일까
아님 프랑스일까
다들 두 다리 쩍 벌려놓고 두 나라를 밟는 체스쳐를 많이 하고 있더라.
의미없는 짓거리(?)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그런데 사실 나도 해보고 싶었다. ^^
MTB를 하는 사람을 만났다.
"본자르노"라고 말하는 게 이탈리아인이다.
몽블랑트레킹을 하다 보면 듣게 되는 인사말이다.
봉주르, 봉수와 : 프랑스
본조르노, 보나세라 : 이탈리아
그뤼찌 or 봉주르 : 스위스
나는 그냥 "안녕"하고 말했다. 다가오는 사람이 어느 국적인지를 모르기에
그냥 나는 나의 인사말을 한것이다.
사실 이게 가장 편했고, 그들도 그렇게 자기들식 인사를 한다.
<국경에서 만난 MTB를 하는 이탈리아인>
세이뉴 고개를 넘자마자 야생화의 초원지대가 드러난다.
아마도 이곳에서 만나는 초원지대가 가장 어마어마 했든 것 같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만나는 초원지대 곳곳이 좋은
야영터이자 쉼터가 된다.
텐트를 지고 왔다면
이곳에서 꼭 야영하고 싶은 장소가 아닐지 싶다.
드러나는 야생화와 더 넓은 설산이 시야 끝까지 펼쳐지는
알프스 최고의 명소다.
<야생화가 드러나는 설산>
내려오면서 바라본 세이뉴 고개.
곳곳이 노랗고 흰 야생화들이 즐비하며
만년설까지 대비되어 색은 더욱 짙고 화사하다.
온갖 형형색색의 기화이초들이
계속해서 발목을 부여잡고 있어 간 큰 사람이 아닌 이상 냉정하게 발걸음을
디디지 못할 것이다.
자꾸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된다.
정면을 바라보면 보이는 풍경이다.
더 넓은 초원지대, 그리고 설산
그아래는 야생화밭이다.
바야흐로 "이곳이 알프스구나" 말하고 싶은 바로 이곳이다.
하이디가 놀았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위사진과 아래사진을 비교해 보시라
파란 하늘 밑으로 설산이 너무나도 대비되는 풍경이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었다면
이런 낭만은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그저 난 날씨 복을 제대로 만났다.
몽블랑 산신령에게 그저 감사할 다름이다.
돌무더기가 보이는 곳에
감사의 돌맹이 하나를 살짝 올려놓았다.
야생화에 심취해 정신없이 내려오니
저런 산장을 만났다.
"어..저게 엘리자베티 산장인가?"
그런데 시간상으로 도저히 나올 위치가 아닌지라 고개가 갸우뚱했다.
일련의 트레커들이 모여 있기에 나는 산장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냥 대피소 역할을 하는 무인 쉼터였다.
사진에 제대로 표현은 안됐지만,
자세히 보면 빨간색으로 보이는 저게 다 구름송이풀 종류다.
하도 많아서 찍어보았는데
광각으로 찍다보니 너무 작게 나왔다.
구름송이풀(외 한라송이풀) 종류는 국내에선, 희귀및멸종위기식물이지만
여기엔 지천이다.
<구름송이풀과 닮은 종류>
저런 언덕 길을 계속해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야생화가 가득 피어난 오솔길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고원의 이름이 '꽁발(combal)'이었다.
골짜기는 '베니 골짜기(val veny)'다.
<꽁발 고원과 베니 골짜기>
언덕을 내려오니 강을 만났다.
빙하가 흘러 만든 강인데, 그 빙하들이 다 말라버리고
이젠 야생화가 피어나는 초원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저 노란 야생화가 도대체 뭘까?
여타 선답자 산행기를 보면
이 구간에선 꼭 비가 왔는가 보다. 이런 풍경을 간직한 사진은 사실 거의 보질 못했다.
맑은 날, 행복한 풍경이 아스라히 드러나고 있지만.
탄성을 자아낼 풍경을 보는 자와 그러지 못한 자의 '시각의 즐거움'은 꽤 큰 차이다.
못 봤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알프스의 낭만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을 간직할 수 있다는 건
커다란 행운이다.
<꽁발 고원의 야생성>
흘러 내린 물가 주위로 동의나물이 절묘하게 피어난 장면이다.
내려오니
풍경은 더욱 화사해진다. 엄청난 풍경이 시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문명의 이기들을 모두 동원해서
이 풍경을 기록했지만, 과연 내가 본 그 감성과 낭만 그리고 충격을 다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 싶다.
동의나물은 설산 아래에도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빙하가 녹은 물이 고여 만들어진 습지였다.
어떠한 설명도 나레이션도 필요없는
오로지 눈과 심장만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코스다.
엄청난 야생화의 물결이다.
사진에 표현된 건 아주 일부분이다.
풀바디 카메라에 20mm 광각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한 장면이다.
노란 야생화의 정체다.
꼽슬머리를 한 앙증맞은 저 야생화가 저렇게 많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종류인지는 당연 모르겠다.
골짜기 전체에 걸쳐 피어난 엄청난 야생화의 물결에
정신줄 잠시 놓고 있었다.
한 때 빙하가 흘렀을 계곡에는 이젠 야생화가 점령하고 있다.
빙하는 몽블랑 정상을 제외하곤 사실 거의 남아 있질 않았는데
지구온난화 영향탓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덕분(?)에 이런 다양성있는 생명체들의 터전을 선물 받은거다.
군데군데 만년설도 이젠 여름을 겨우 넘기고 있을 정도다.
해가 갈수록 몽블랑의 빙하는 줄어들고
이렇게 다양한 야생화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
시원한 에비앙을 만났다.
세이뉴 고개 밑에서 채운 빙하수가 남았지만, 다시 가득 채워본다.
샘터라고 하지만 어치피 흘러내리는 빙하의 물을 받아 놓은거다.
산장에서 사용하는 물도 똑같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빙하수는 그냥 마셔도 된다.
물른 고인 물은 절대 음용불가다.
<엘리자베따 산장 밑의 샘터>
'구름 위의 산장'이라 불리는 엘리자베따 산장이다.
칼바위 능선이 이채로운 베니 골짜기 아래 위치한 천혜의 산장이다.
딱히 배고플 것도
또 마실 것도 아쉽지 않아 그냥 지나쳤지만, 여유가 있는 트레커라면 좀 머물다 가보자
트레커들이 꼭 들르고 싶어 하는 지명도가 높은 산장이다.
사진으로 보이듯이 천 년의 빙하를 손에 잡을 듯 코앞에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구름 위의 산장, 엘리자베따>
엘리자베따에 서 있는 TMB 말뚝이다.
여기서 메종 빌 산장까지 2시간 55분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나는 4시간 20분 걸렸다.
아마 저 말뚝 시간표는 가벼운 배낭을 멘 아주 키가 큰 사람이
성큼성큼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리면 가능한 시간대다.
물론 오르막도 쉬지 않고 말이다.
거의 신뢰 되지 못할 시간표다 믿지 마시라.
나는 다른 사람 산행기에 나온 말뚝 시간표 따져가며 하루 일정 계산했다가
결국 엉망이 되고 말았다.
뙤약볕에 저런 그늘도 없는 길을 걷기란 좀 어렵다.
하지만 풍경이 그림 같아 늘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나.
<꽁발 고원>
엘리자베따 산장이 그림 같다.
하룻밤 머물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그런 명소다.
아마도 몽블랑트레킹 능선에 위치한 산장 중
락블랑 산장과 더불어 최고의 명소가 아닌가 싶다.
이 골짜기 이름이 베니 골짜기다.
'Lac du combal'
꽁발 호수의 모습이다. 여기서 임도 길 따라 그대로 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버스를 타고 꾸르마예르로 갈 수 있다.
1시간 거리의 LA VISAILLE 마을로 걸어가면
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하지만 never! 절대 버스 타지 마시라
비가 오지 않는다면 우측 메종 빌로 향하는 오르막을 선택하길 바란다.
한발자국 조차 제대로 못 디딜
엄청난 알프스 최고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꽁발 호수에서 꾸르마예르로 가는 갈림길!
직진하면 버스!
TMB따라 우틀하면 오르막!
힘들지만
오르막을 선택하라 권하고 싶다.
왜냐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산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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