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규의 산과야생화

산행기/지리산행기

심박골~치밭목대피소~중봉~하봉~심박골

구상나무향기 2015. 10. 2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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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가을이다.

하늘도 높고 말도 살찌고 나도 살찌는 낙엽의 계절이자 단풍의 계절이다.

 

쓸쓸히 바닥만 긁고 있는 건 죄악임을 설파하는

살아있는 감성의 낭만파.

 

"죽더라도 나가서 죽자"를 외치는 가출의 달인

본인 되시겠다.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을 사뿐히 즈려밟고 싶어

안달 난 자에게, 주말의 뒹굴거림은 죄악과 같으니

 

"나가자, 자! 떠나자"

 

 

<가출의달인>

 

 

 

나는 일을 한다.

참새와 생쥐. 요정이 도와주지  않아도 계모가 구박하여도

난 호박마차를 타기위해 열심히 일을한다.

 

부디 파티시간에 늦지 말아야하겠기에 나는 열심히 일을한다.

 

치열한 시간이 지나고 고요한 이 시간이 되면 소중함이란 걸 다시금 되새김질한다.

누구는 더 쉽게 많이 갖지만 난 나한테 주어진 최소한의 조건에 감사하며 또 내일을 맞을것이다.
이 노곤함이 행복하다. 난 즐길가치가 있다.

 

-조은희 수필집에서-

 

 

 

 

 

 

 

 

자...열심히 일했는가

그럼 떠나보자

 

뭐 어차피 일을 열심히 했든 안 했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고 돌아서 똑같이 베풀어주고 떠나는 '기회의 신'이다.

 

"기회는 뒤통수가 없어 잡을 수도 없고

날개가 달려있어 재빨리 떠난다"라고 딸내미가 SNS에 올려놨었다.

 

어쨌든 시간 나고 조금이라도 다릿발 튼튼할 때

기회를 잡아 떠나보자.

 

 

 

 

 

<무제치기폭포>

 

 

 

"여기서 야영하면 정말 좋겠는데요"

 

몇 해 전, 눈 덮인 험난한 장당골을 넘고너머

간신히 등산로에 안착했을 때, 그때 봐둔 모처의 야영 장소가 있었다.

 

죽을똥 살똥, 간신히 벗어난 악몽같은 눈길 속에서도

최적의 야영터를 찾아냈든건 어찌보면 산꾼의 본능이 아닐지 싶다.

 

동행한 지인에게 다짐을 했건만

시간은 돌고 돌아 벌써 몇 해가 흘러버렸다.

 

 

 

<심박골 단풍>

 

 

 

벼르고 벼르다.

결국 베낭을 메었다.

 

이 가을 다 지나고 나면 추워 야영하기 힘든 계절이 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겨울엔 야영을 주저하는 탓에

가을을 고비로 야영은 잘하지 않는다.

 

딴은 장비도 부족하고, 얼은 손 녹여가며 먹거리를 다독거릴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기회의 신은

자주 오는게 아니라고 딸래미가 말했다.

 

맘 먹었을 때, 주저없이 미련없이 떠나는게 상책이다.

딸래미가 밀어줄 때 떠나야지 딴지걸면 그때는 못간다.

 

 

 

 

<심박골 단풍>

 

 

 

단풍은 입구에서만 한창이었고

정작 중봉 아래와 써리봉 일대의 단풍은 사실상 없었다.

 

예상했지만, 계절은 벌써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람 불 땐 제법 사무쳤다.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뜬금없이 비까지 쏟아진다.

 

"이런 젠장 맞을..."

 

등짐 무겁게 진 보람이 혹여 바람과 비에 퇴색할까 싶어

느닷없는 걱정이 앞선다.

 

하늘나라 선녀에게 전해 듣길 오늘 내일은 비 안 내린다고

분명 말해줬기 때문이다.

 

텐트 치기도 전에 비바람에 된서리 맞으면 골치다.

 

 

 

 

 

 

산행한 지 4시간여, 모처의 장소에 안착하여

재빨리 텐트를 치니 시간은 오후 6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떨어지더니

어느덧 사위는 깜깜한 어둠 속이다.

 

 

 

 

 

 

"하늘 아래 땅 있고, 거기에 내가 있으니

어디인들 이내 몸 둘 곳이야 없으리....하루해가 저문다고 울 터이냐"

 

귀거래사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지어 단출한 밥상을 마련했더니, 걸인의 찬이요 황후의 밥이다.

 

 

 

 

<황벽나무 열매>

 

 

 

홀로 누워 하늘을 보니

휘엉찬 명월이 어느덧 천왕봉 동쪽 녘에 걸렸다.

 

별까지 초롱초롱 빛나는 통에

혹여

내일 3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그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저어기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일출 때 산허리에 휘감긴 산안개 탓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덕은 무슨...

 

 

 

 

 

하지만

일출은 못봤지만

 

새벽녘, 온 사위에 산안개가 짙게 내리 앉았는데

비는 어느덧 거치고 바람은 고요해졌다.

 

언제 그랬냐 싶게 포근하고 아늑한 시간을 부여해준

지리산의 새벽이었다.

 

 

 

 

 

밤의 기운을 잠시간 즐기며 

안개 서린 숲 속의 분위기를

마음껏 느껴본 야영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집에서야 어떻게 이런 분위기와

감성에 젖어 볼 수 있겠는가

 

자연의 품속에서나 가능하기에, 오늘도 배낭을 메고 떠나는 이유다.

 

 

 

<천왕봉 실루엣>

 

 

 

실컷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더니

 

벌써 해는 중천에 떠

사레 긴 밭 갈라며 게으른 소년을 채근하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은 어느덧

숲에 스며들어, 훈훈한 기운으로 잠식하고 있었는데

 

'숲의 망중한'을 즐기다 못해 지루해질 시간에

엉덩이를 떨치고 일어난다.

 

 

 

<사람 얼굴 닮은 바위>

 

 

 

'행복은 담보되지 않는다.'

 

인생의 행보가 어찌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기로에 서, 판단을 저울질 하는건 누구에게나 올 수있는 사정이다.

 

등산로는 여러개다.

오늘 이리 못가면 다음에 다른 길로 가보면 되는거다.

 

하지만

인생도 그럴까? 

 

노인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젊을 때 더 많은걸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사랑이나 책임 그리고 의무 보다

더 중요했든건 바로 '나의 행복'이었다.

 

 

 

 

 

 

 

 

하봉 헬기장에서 치밭목 산장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의 루트를 택했다.

 

더 먼 길도 있었지만, 짊어진 배낭의 무게가

사뭇 무릅의 압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시간만 족히 4시간 이상은 소요되기 때문에

험한 길 보다 조금은 편한 길을 찾은 탓이다.

 

당장 이번주에 대회가 기다리고 있는데 컨디션 조절도 해가면서

산행해야지 "아몰랑"했다가는 대회 망친다.

 

 

 

 

 

 

하봉 헬기장 밑 하봉샘은 거의 말랐다.

이제 갈수기라 하봉샘 믿기란 힘든 시기다.

 

더 한참을 내려가면 계곡이 기다리고 있지만

하봉에서 거의 20분을 내려와야 하는 부담이 있으니 물은 충분히 챙기자.

 

경험상 하봉샘은 10월 이후론 거의 기능 상실이다.

 

어느덧

산사태가 심하게 난 조개골 상단 부분을 지나니

치밭목 산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산장지기 민대장이 타주는 원두커피 한잔에

산장의 낭만을 오붓이 즐기고 나니 오후 나절 시간은 금방 흘러버린다.

 

 

 

 

<하봉샘은 거의 말랐다>

 

 

 

서둘러 심박골로 다시 내려오니

1박2일 지리산 야영 산행은 비로소 끝이난다.

 

야영하면서

많은 사색을 했었다.

 

비단 산이 좋아 떠나는 길이지만

그 시간은 늘 사색을 동반하는 감성의 시간이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 그런지

요즘은 생각이 많다.

 

사실 생각 많다고 딱히 현명한 결정이 나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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