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욜, 4시간 동안 주남저수지를 걸으면서
줄곧 내 머리속은 5월의 신록이 한창인 숲 속에 머물고 있었다.
"내일은 숲에 들어가야지"
내 안엔 '역마살도보족' 망령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놈이 수시로 날 유혹한다.
우야튼
'다릿빨 튼튼할 때 일단 다녀보자'가 내 철학이고 보면
역마살과 그런데로 궁합이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숲만 만나면 신난다.>
배내고개에 주차한 뒤, 주암계곡까지는 주창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주암계곡은 이미 많은 산행을 해온 길이라, 인지를 잘하고 있어 헤맬 일은 없었다.
오늘 코스는
배내고개~주암계곡을 통해
고사리분교~재약산~천황산~능동산 코스다.
고사리분교를 집어 넣은건
예전에 그 근처 습지서 흰제비란과 닭의난초 서식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필 때가 된 야생난초를
보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사자평 복원, 억새밭 조성 장면>
심종태바위 아래 주암계곡은 참으로 걷기 좋은 길인데,
주암계곡에서 능선의 쉼터까진 1시간시간 정도가 걸린다.
사부 자기 계곡으로 난 길을 걷다보면,
어느듯 능선까지 올라올 수 있는, 오름도 그리 심하지 않는 평탄한 길이다.
쉼터에서 고사리분교까진 2KM 남짓 되는 평지 길인데,
땡볕에는 여간 지루한 길이 아니다.
주위로 복원을 위해 인위적으로 억새밭을 조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잘 조성된다면 아마도 제법 볼만한 식생이 되지 않을까 싶다만
이제 모심듯 심어 놓은 사정이라
다소는 황폐스럽게 보인다.
길 잘 만들어놨지만,
억새 복원 때까진 어수선하고 보기 싫은 모습이다.
숲 속에서 숲을 보기 보단
저런 황폐화 된 풍경을 바라보는 건 다소는 민망스럽다.
하지만 훼손된 지역을 복원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니 불편하더라도 지켜봐주자.
사자평 습지는 보호하고자 저렇게 감시초소까지 만들어놨는데,
생태계 좋았던 고사리분교 옆 습지는 다 훼손시켜 버렸다.
도대체 습지 보호의 취지가 뭔지 무색해지는 장면이다.
고사리분교 옆 작은 습지에는 흰제비란을 비롯해 닭의난초, 산제비란 같은 귀한 난초과 식물이나
어수리, 지리강활 그리고 하늘나리 같은 이쁜 야생화도 많이 자라는 생태계의 보고였다.
<공사중인 고사리분교 그리고 사라진 습지>
고사리분교에서의 식물 찾기는 하릴없이 되어버렸다.
습지의 기능은 이미 상실된 습지였기 때문이다.
산행이나 해보자.
재약산 수미봉까지는 지척이나
오름의 지세가 있기에 꾸역꾸역 천천히 올라보았다.
한낯, 땡볕의 기운은
지친 산꾼을 맥없게 만들고 있었다.
<고사리분교에서 본 재약산 수미봉>
오르는 도중 그늘사초의 시원한 풍경이 압도한다.
저런 모습에 지금의 시기를 사랑하는지 모를일이다.
가장 신록이 아름다울 시기가 딱 이 때다.
오랜만에 재약산에 올랐다.
뭐
딴은 영남알프스에 수시로 올랐기에 그 횟수에 대해서는 셀 수도 없겠지만
산은 이번이나
다음이나
또는 저번이나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때 그 봉우리는 그대로겠지만, 가질 수 있는 낭만과 분위기는 모두 다르다.
<재약산 수미봉에서 의례적 똥폼>
몽블랑에 가기 위해 이미 수개월 전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 프랑스 샤모니 호텔과 제네바 공항 픽업에 따른 차량 예약을 했더랬다.
어려운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글번역기로 돌려가며
겨우 해냈다. 뭐 부딛치니 다 되더라만은
작년 같았으면, 아마 이 시기에 터키에 가 있었을 것이다.
벌써 1년이 흘렀다. 세월은 정말 빠르다.
<사자평 고원>
1년 전, 나는 출국 공항의 한 켠에서 한장의 사진을 전송했었다.
웃고 있지만
내면의 나는 결코 웃고 있질 못했다.
터키 여행 내내 '망상의 잔재'는 나를 불편케 했었다.
이제 1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년 후, 사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뭐가 달라지겠는가
늘 그랬다.
천황재에서 천황산 오르막은 쉽게 올라보질 못했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힘들었지만
하지만 이젠 안다.
천천히 한발 한발 오르다보면 어느듯 정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힘들지 않는 결과가 어디있고,
아픔 없는 노력이 어디 있는가
다 겪으면 된다.
등산 경력 15년 되니, 아주 조금 깨달음이 생기더라.
<수미봉에서 바라본 천황산, 아래가 천황재다>
그 날 날씨 한 번 간만에 맑았다.
내내 황사로 뿌연 나날을 보냈는데, 전날 비로 씻겨 낸 하늘은
마치 가을 하늘 인양 푸른 물감을 채색한 듯 그렇게 맑아 있었다.
"6월에는 좋은 소식이 있겠네요"
철학관의 능력 좋다는 도사가 나에게 일러준 3개월 전 예언이었다.
그래서 기다려지는 6월이다.
뭐 도사의 예언이 아니라도 항상 재미나 게 살고 있으니 딴은 틀린 말은 아닐지다.
<천황산, 의례적 똥폼>
천황산 그늘 아래에서 주마등 같았던
'추억의 잔재'들을 뜨올려 보며, 잠재된 감정을 털어 내는 시간들이었다.
홀로 산행을 하다보면
사색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이 때 이런저런 생각을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풀어 내는 편이다.
샘물상회부터는 지루한 임도길이 나온다.
배내고개까지 대충 5킬로 좀 안되지 싶다만, 개인적으로 이 길 별로 안좋아한다.
워낙 지루하고 더울 땐 땡볕의 강렬함이 더해지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해가 하루 종일 비추는 양지고
어느 때 걷더라도 이 길은 그늘이 없는 곳이라 더위에 식겁하는 구간이다.
<능동산 직전, 쇠점골 약수터>
온종일 먹은 거라곤
참외 하나와 오렌지 두 개, 그리고 물 반병만을 마셨다.
홀로 산행을 할 땐, 거의 먹거리는 챙겨오지 않는다.
뭐 간식 한두 개를 더 챙기긴 하지만 먹는 경우가 별로 없다.
천천히 쉬지 않고 걷는 게 타입인지라
먹는다고 쉬는 것도 사실 귀찮다.
울트라마라톤은 많이 먹고 뛰는 게 아니다.
늘 적게 먹으면서 오래 동안 움직일 수 있는 메카니즘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런 습관이 산행이나 평소 생활에서도 도움이 된다.
능동산에서 석남터널까지는 4킬로 남짓되는데,
차량만 회수된다면 더 걷고 싶었다.
가지산으로 올라 석남사로 하산한다면
3시간 정도만 소요하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석남사에서 배내고개로 이어지는
교통편이 매우 부실해 배내고개로 그냥 하산하기로 하였다.
사실 좀 지친것도 사실이다.
따끈한 아메리카노 한잔이 매우 그리운 그날이었다.
일련의 등산객 무리 중, 선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아주머니가 찍어 준
능동산 사진이다.
혼자 다니는 습관 탓에
시끌벅적한 걸 그다지 즐기지 못한다. 그래서 부산한 무리가 있음
후다닥 앞서 뛰어가 버린다.
그런데 간혹 발목 잡힐 때가 더러 있는데
그때가 언제냐 하면
"총각 쉬다 가"
총 19.2KM 나왔다.
시간은 대략 7시간 넘었는데, 고사리분교에서 습지 찾는다고
30분 소요된 거 빼고는 엉덩이 붙여 본적은 10분이 채 되질 않는다.
배내고개에서 주암계곡 입구까지는 도로다.
걸을 때 주의해야 할 구간인데 그것만 조심하면
원만한게 원점회귀로 돌 수 있는 알찬 코스다.
하루나절 걷기론 손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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