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계곡 입구>
꼼지락 거렸더니 늦어버렸다.
적어도 오전 6시에는 출발하려구 했는데
시계는 6:40분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렌턴을 켰지만 이내 바로 꺼버리고 말았을 정도로
여명은 이미 숲에 가득차 있었다.
장유계곡 주차장에서 우측으로 오르는 코스.
용지봉 코스 중 아마도 이 코스가 제일 힘들 것이다.
계속 급한 오르막을 치고 올라야 하기 때문인데,
개인적으론 이 길을 늘 선호한다.
<아침의 숲, 산행은 늘 즐겁다>
장유계곡~용지봉~정병산
대략 확인해보니 거리는 16킬로 정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왕복하면 32킬로가 되는데
이게 오늘 나의 목표다.
정병산 구간에 대한 경험은 서너 번 있었기에
길에 대해서 익히 안다고 여겼지만, 착각은 자유였다.
<용지봉 정자>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금껏 내가 해온 환종주 중에서 제일 험한 코스였었다.
내서환종주, 북면환종주, 5산종주, 산해원종주 등 30킬로 이상되는
다양한 종주를 했지만 이 코스 만큼이나 굴곡진 코스는 없었다.
오르락내리락, 평지는 잠시
오르거나 아님 내려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야말로 '동네뒷산잔혹사'였는데,
낮다고 얕볼게 아니란 걸 또다시 절실한 시간이었다.
<일출은 구름 뒤로>
창원.진해.마산 세 도시를 지난다고 해서
붙여진 산해원 종주는 32킬로다.
바로 이 용지봉~정병산 코스를 지나가는데, 개인적으로도 2번의 경험이 있어
이 코스에 대해서는 자신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건 지나가면 그뿐.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였기 때문이다.
<5일 만에 다시 찾은 용지봉>
불과 4일 전, 설 연휴 때 20킬로 산행을 했기에
다소 체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내내 하긴 했었다.
그랬기에 다소는 좀 늦었다고 본다.
컨디션이 좋았다면 아마 조금 더 빠르지 않았을까 성급한 결론을 애기하지만
사실 완주 자체가 목적인 거지
시간은 목표가 아녔었다.
해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렌턴을
비추면서 걸으면 그뿐인 거다.
<용지봉에서 정병산 표시는 보이지도 않는다.>
장유계곡에서 용지봉까지는 4.5킬로 정도 남짓.
1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새벽의 숲 기운이 너무 좋아
시간 가는지도 몰랐다.
오늘 목적지이자 턴의 지점 정병산은
아득하기만 하다.
용지봉에서 정병산까지 거리는 대략 11.5킬로다.
<정병산이 아득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딱 좋은 기온인지라 산행하기엔 최적이었다.
정병산에서 돌아올 땐 자켓도 벗었다.
땀이 잘나지 않아 겨울 산행엔 거의 물을 마시지 않는데
더워서 그런지 물이 모자라 제법 곤역을 치뤘다.
<대암산 가는 길에서 본 불모산과 안민고개 능선>
용지봉과 대암산 중간에 솟은 봉우리가 바로 신정봉이다.
여기엔 돌탑들이 많다.
폰 꺼내기 귀찮아서 찍지는 않았지만
나름 정성을 쌓은 '공들인 답'들이 제법 많다.
탑이나 신이나 피드백이 있진 않겠지만,
"무사히 완주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소박한 염원을 빌어 본다.
<고생보따리>
신정봉에서 대암산을 바라보니 정상에
등산객 한 두 명이 어슬렁 거리는 실루엣이 보인다.
9시나 되었을 시간인데,
한 명 두 명 점차로 등산로에 사람이 불어나 저마다 인사를 나누며 지나간다.
부지런한 사람은 운동을 좋아하는 법.
특히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부지런한 사람들이라 보면 된다.
<봄에 진달래로 유명한 대암산>
대암산 뒤로 정병산이 아득한데
여기서 방향을 보며 그제야 이마를 탁 친다.
"아이구야...뭔 봉우리들이 저리 많냐"
그랬다.
대암산부터 정병산까지는 봉우리들의 연속이고
굴곡진 산세의 흐름이 소위 '장난 아닌 빡센 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 산해원 종주하면서 느꼈던
길고 긴 고난의 시간들이 다시금 느꺼워지는 순간이었다.
대암산부터 정병산까지 내내 시원한 풍경이 시선을 압도하는데
왼편으론 창원 도심지 풍경.
오른편은 진영. 진례 벌판의 광활함이 드러난다.
여기서부터는 폰을 가방에 넣었기 때문에
정병산 직전까진 사진이 없다.
산행에 몰입한 시간이었다.
<창원 도심지와 공단>
우곡사 갈림길.
정병산까지 이제 4킬로 가까이 남은 시점이다.
"휴....."
한숨을 길게 내 쉬어 본다.
힘들었기 때문인데
정병산에서 다시 돌아가기란 정말 버거울거란 생각이다.
"탈출 해 말아?"
악마의 속삭임은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는데,
심적 갈등은 우곡사 갈림길에서 심화되고 있었다.
<우곡사 갈림길>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약해진 마음은 정신력에서 기인한 것이지 결코 체력적인 측면이 아니란걸 말이다.
사실 체력은 정신력에 기대지만
그 정신력은 체력에 기반을 둔다. 서로 상호작용이다.
마라톤을 하면서 늘 겪는 과정이
바로 이 약해진 정신력을 극복하는 순간인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수리봉 올라가는 계단>
악마의 속삭임도 잠시
어느덧 또 힘이 나고 또 의지의 정신력이 불끈 솟아난다.
"하루 이틀 해본 것도 아닌데
새삼 뭐 이 정도 가지고..."라며 나만의 호기를 부려본다.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능선의 굴곡이 제법 심하다. 저 봉우리들 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걸어온 길, 저멀리 용지봉이 아득하고도 아득하다>
정병산 올라가는 계단 길이다.
목적지인 정병산.
여기가 끝이 아니라 여기가 이제 시작인 것이다.
어떤이는 다 왔다고 좋아하겠지만,
나같은 이에겐 이제 다시 고행의 시작이란 사실에 또다시 의지를 불태워야 하는 싯점이다.
같은 봉우리에 서 있지만
관점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정병산 가는 계단 길>
참으로 오랜만에 서보는 정병산.
동네 뒷산이라고 얕볼 수 없는 매력을 잔뜩 가지고 있는 창원의 명산이자
경남의 자부심이다.
입술이 빠짝 타 올랐다.
물도 못 마시고 지쳐있었기 때문인데, 그래도 돌아갈 의지는 활활 타고 있었다.
이제 16킬로 왔는데
더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어설픈 산꾼>
정병산 쉼터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비음산만 하더라도 정병산에서 6.7킬로에 이른다.
대암산까지 8.9킬로인데,
아마도 대암산에 이르면 해가 떨어질듯 싶었다.
역시, 대암산에 도착했을 때 해는 서산으로 다 떨어졌고
렌턴을 만지작 거리면서 용지봉에 올라야 했었다.
<걸어온 길이 이제 가야할 길이 되었다.>
자... 다시 힘을 내보자
이제 시작이다.
왔든 길 돌아가면 그만이다.
스틱을 불끈 쥐고, 허벅지에 더욱 힘을 실어본다.
<정병산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가 비음산>
넋놓고 한참을 걷고 있었다.
비음산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에 만난
구복만님이다.
물 한병 넙죽 받아서는 아주 요긴하게 잘 마셨다.
물이 모자라 아껴서 마시고 가고 있던 터였기에 나에겐 오아시스를
만난격이다.
용지봉~정병산 구간엔
약수터가 없다.
가장 짧은 구간이라도 능선에서 700M 이상을
내려가야만 우곡사나 약수터가 나오기에 이 구간 산행 시 반드시 물을 넉넉하게
준비해야 할 능선이다.
비음산을 지난 후, 고개만 숙인 채
오로지 산행에만 전념했었다. 걷고 걷고 또 걷고
어느듯 대암산이다.
벌써 정병산이 아득하기만 한데
이제 여기까지만 와도 심리적으론 충분히 안정적이다.
여기서 용지봉까지는 2.1킬로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의 다 끝났다는 심리 때문이다.
<대암산에서 바라본 용지봉>
이제 해는 서산으로 다 떨어지고
일몰 후 이어지는 옅은 빛만으로 산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온들 뭔 걱정인가
렌턴을 비추면 그만인 것을.
용지봉에 오를 때까지 어둠은 짙어지지 않아
렌턴은 사용하지 않았다.
체력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어
여유가 가득했던 그시간 이었다.
<대암산까지 걸린 시간>
대암산까지 총 27.79km
10시간을 갓 넘기고 있었다.
이제 용지봉을 넘어 장유계곡까지 4킬로 정도가 남았다.
늦은 시간, 인적 없는 스산한 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 서니
더욱더 활기가 넘치는 게 역시 나는 산꾼 기질이 있는가 보다.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오히려 더 신나는 이유.
사실 난 이때가 더욱 엔돌핀이 돌기 때문인데
그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다 혹여 멧돼지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었다.
주위로 멧돼지가 파놓은 구덩이들이 군데군데 보였기 때문이다.
<늦은 시각 대암산에서>
정면 봉우리가 신정봉,
뒤 봉우리가 용지봉이다.
오늘 이 고단한 도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조금 더 힘을 내보자
오전에 찾아왔던 신정봉에
다시 도착했다.
쏜살같이 용지봉으로 향한다.
내가 쉴 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정봉>
드디어 용지봉에 다시 섰다.
정병산에서 출발한 시각이 오후 1시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어 닥치는 용지봉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정각이니 딱 5시간 걸렸다.
용지봉~정병산 구간이 11.5킬로인데
갈 때 4시간 30분
올 때 5시간 소요된 것이다.
<용지봉에 다시 돌아왔다>
아까보다 더 찬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는 용지봉.
홀로 서서 사위를 조망하니 이것도 나름 낭만이요 재미다.
어둠이 내려 앉은 산 정상에서 서 보는 느낌도 딴은 나쁘지 않았음이다.
어둑어둑 장유 시내엔 야경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유 살면서 아직 한 번도 산 위에서 바라본 야경은 없었던 것 같다.
늦은 시각
동네 뒷산에 오를 이유가 그동안 없었던 모양이다.
장유사에 도착하니 예불이 한창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임도로 따라 내려가기로 한다.
산 길로 내려갈려면 아무래도 위험할까 싶어서 선택했는데
거리로 따지자면
길이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임도가 더 멀다.
그래도 안전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드디어 오늘 산행의 종착지 장유계곡 주차장에 도착한다.
징하게도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물론, 더 걸을 수 있었다면 더 걷는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주어진 목표는 이미 충분히 달성했기에 흡족했었다.
오늘 산행은 도전이자 훈련이다.
기량을 녹슬지 않게 관리할려면 언제나 긴장감 있는 훈련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해가 갈수록
기량이 줄어드는 게 느껴지기에 유지될 수 있도록만 관리하고자 하는 게 목표다.
더 좋아지기 보단
기량이 저하되지 않도록만 관리해도 충분한 성공이라 여긴다.
고생보따리에 이것저것 넣긴했는데
물 한병
조그만한 과일3개 초코바 2개.
12시간 걸으면서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쉬지 않고 걸었다.
장거리는 오히려
여유있게 먹으면서 하는 산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이 다 지나가는데
눈구경은 언제 해보나
지리산이 아른 아른 거리고 있는 중이다.
이번 주말, 역마살 낀 자의 일탈을
다시 시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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