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죽겠다. 다시는 이 짓거리 하나 봐라"
몇 해 전 지리산 왕복종주를 끝내고 난 뒤 내가 노고단을 내려오면서 공허히 내뱉은 주절거림이다.
36시간이나 걸린 오욕의 시간에서
이러한 무식한 짓거리는 다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물론 기억은 잊으라고 있는 거다.
까맣게 그때의 기억을 잃은 어설픈 산꾼 하나가 새벽 1시에 화엄사 앞에 선 건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약 46.2km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여기서 짧다고 말하는 건 J3 클럽의 소위 '산짐승적 행위'에 대한 고찰이다.
그들은 100km 심지어 200km 산행도 해내는 철인들이기에 거기에 비한다면 46.2킬로 완주는 조족지혈이다.
조족지혈이든 대단하든 의미는 각자가 다르다.
똑같은 공식은 아니겠지만, 지리산에 들고 나는 수많은 산꾼 중 종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도 많으리라 본다.
<너무 어두워 머리에 쌍라이트를 달았다.>
어둠 속으로 내달리는 어설픈 녀석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몇 해 전 되뇌었던
그 문구는 이미 기억 속에 잊힌 상태다.
100km 울트라마라톤 완주 20여 회, 65킬로 산악마라톤대회,지리산 왕복종주 등의 자잘한 기록들도 많지만
정작 화대종주는 기회가 닿지 않아 매번 계획만 세웠다 지우기를 반복했었다.
'나는 느리다'
난 빠르지 못하다. 그래서 늘 상 꼴찌다.
대회에 나가도 3초 4초 차이로 제한시간에 맞춰 들어온다.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런것이 아니라 실력이 그뿐이다.
꼴찌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꼴찌도 실력(?)이 되어야 하는 거다.
그러나 화대종주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그건 대원사에서 출발하는 버스 시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동료가 기다려준다면 동료의 '정신적 채근'에 시달려야 하기에 여유 있는 스피드는 용납이 안 된다.
즉 '지난한 속도' 보단 '안정적 속도'가 화대종주의 포인트다.
새벽 1시에 출발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18시간 예상하고 들이밀었다.(결론은 16시간 44분)
<언제부터인가 코재가 무넹기가 되었다.>
'한 치 앞'
즉 3.3cm 정도 앞을 뜻한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실제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안개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해군 조타사로 근무했기에 구축함을 3년 동안 탔었다.
해상 근무 시절 해무에 의한 저시정 항해를 할 때였다.
"한 치 앞이 안 보입니다."라고 견시의 보고가 있었는데, 갑판으로 나가보니 정말 그랬다.
실제 코앞의 동료가 안 보여 더듬어 확인해야 할 정도의 짙은 해무였다.
이날이 그날과 같았다.
어둠 속 짙은 안개로 두 개의 렌턴으로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거다.
짙은 안개를 뚫고 노고단에 오르니 이젠 강풍이 불어댄다.
버퍼로 감싸고 자켓으로 중무장한 뒤 귀거래사를 읇어대며 걷고 또 걸었다.
"바람아 불어라~♬ 이내 몸을 날려주려마, 하늘아 구름아~♬ 내 몸 쉬러 떠나 가련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정확히 3시간 걸렸다.
<안개 짙은 연하천산장>
토끼봉 즈음에서 여명이 오더니 연하천에 도착하니 거의 날이 밝았다.
그제서야 부지런한 산꾼 몇 명도 보인다.
정신없이 걸었더니 벌써 연하천이다.
어둠과 안개로 풍경을 무시한 채 걷고 또 걸었던 몰입의 시간이었다.
물론 경치가 좋다고해서 쉴 수 있는 유람형 산행이 아니기에
조망에 대한 미련도 없는 고행의 길이 화대종주다.
나중 세석을 지나자 날씨는 매우 화창하 게 변하여
천왕봉이 깔끔하 게 조망되어 걷는 즐거움이 한층 배가 되었다.
<벽소령>
근 10년 전 기억일거다. 10월 첫 주로 기억되는데, 그 때 선비샘에서 비박 하면서
겨울 날씨를 만나 식겁했던 기억이 있었다. '가을속 겨울'을 만난 그 때의 악몽이었다.
종주 후 입술에 동상이 걸려 내내 고생했던 선비샘 비박의 추억은
동료 사이에서 내내 회자되었던 사건 중 하나였다.
뜬금없는 변덕 날씨의 경험은 또 있다.
비박 짐 짊어지고 종주하겠다고 당차게 떠난 어느 10월 중순,
단풍 든 지리에 첫눈이 내리면서 종주가 스톱된 사건도 있었다. 너무 추워 하산을 결정한 것이다.
계절감 별로 없는 마고할매의 심술에 당한 것도 여러 번이다.
"휴~ 세석이다. 정말 지루하다 지루해"
기억력 떨어지는 이 어설픈 산꾼이 어느듯 세석에 도착했을 땐
짙은 안개도 어느듯 말끔히 치워진 상태였다.
공활함이 가득했던 전형적 가을의 하늘이었다.
"폰 바꿔줘...이건 안 터져도 너므 안 터져~~~"
한달 전 새로 개비했던 폰이 촛대봉에서 먹통이었다.
대피소로 내려가도 폰은 묵묵부답 엑스자가 뜨면서 통신은 내내 불통이었다.
"롱텀에불루션인가 뭔가 하는 갤락시 쓰린데.."
때깔 좋은 새거였지만 불통은 소통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옆의 산행객의 폰이 빵빵하 게 터지는 것을 확인하곤
다음 날 득달같이 달려가 폰 교체를 요구했었다.
그리고 세석에서 다시 안테나를 확인하기까진 정확히 한 달
이번에는 안테나가 4개까지 빵실하게 뜨고 있었다.
폰은 구매한 지 보름 이내에 이의를 제기하면 교체해준다.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이 노래가 가물거려 도대체 어디서 들은 노래일까 산행 하면서 고민을 꽤 했었다.
알고보니 애국가였다.
연하선경의 맑은 모습은 겨울이 아니면 거의 본 적이 없었든것 같다.
물론
여름나절 피어나는 운해에 빗댄 이름이 연하선경이지만,
정작 연하선경은 겨울 모습이 더 운치있는 게 아닐지 싶다.
연하선경에서 신선 보단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70세가 다 되신 할머니가 그렇게 연하선경을 걷고 계신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랬다.
"어디까지 가십니까"라고 물어니
"법계사"라는 답변이 뒤따른다.
"어디서 출발하셨습니까?" 물으니 돌아온 답변은 더 놀랍다.
"화엄사"
이 할머니는 화엄사에서 출발해 법계사까지 사찰 순례를 하고 계신 독실한 신자셨다.
이런저런 물음과 답변을 통해
할머니가 꽤 오랫동안 지리산 산행을 하신 배테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노익장으로 유명하신 분이 울트라마라톤계에도 여러분 계시는데
이렇게 내 눈앞에 또 한 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정말 진리다.
발목을 삐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곤
마침 가지고 있는 진통제를 나누어 드렸더니
"성불하세요"라는 말을 두세 번이나 하신다.부디 법계사까지 무탈하게 마무리 잘 하셨기를 바래본다.
<연하선경 뒤로 천왕봉이 보인다>
장터목이다.
화엄사에서 12시간 10분 정도 소요되었다. 빠른 걸음은 아니다.
장터목에서
생라면과 커피 캔 그리고 에이스 과자 하나를 사서 갈무리한다.
생라면은 비상식으로 먹기가 좋아 내가 선호하는 식품 중 하나다.
스프까지 쳐서 부셔 먹으면 그 맛이 남다르다. 배부름과 염분을 동시에 섭취하면서 맛까지 취할 수 있다.
건빵도 내가 아주 선호하는 비상식 중 하나다.
간편하면서도 배부름이 가장 빠른 식품으론 건빵이 최고다.
과일과 건빵 그리고 떡이나 생라면만 있으면 먹거리론 충분하다.
도시락? 그런 건 없다.
쉴 시간은 없다. 그냥 걸으면서 먹고 마신다.
화장실 간다고 잠시 수풀 속으로 들어간 시간 외에 엉덩이 쉬어본 적은 없었다.
천왕봉 오름은 가장 힘든 구간이다.
근육통이 아우성을 치지만 인내로 극기할 수 밖에 없음이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쉬지는 않는다. 쉬더라도 잠시 그 자리에 멈추는 정도다.
다소 빠르지 못한 걸음이더라도 지체하진 않은 꾸준함이 있어야 장거리 종주는 완주할 수 있다.
힘들다고 쉬면 오히려 완주를 더욱 힘들게 한다.
<제석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제석봉에서 바라 보는 천왕봉이 이리 맑은 날도 드물지 싶다.
눈 앞만 바라보고 걷는 밤 길과 이렇게 화사한 경치가 드러나는 길은
정서적인 감동도 다를 뿐더러 평화로움과 안정감도 느껴진다.
같은 고행이라도 그 정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흐린 날보다 맑은 날 종주가 더 쉽다는 말이다.
비오는 날 땅만 보고 걷는 건 정말 힘든 개고생이다.
드디어 천왕봉이다.
화엄사에서 01:00 출발해서 14:30분 도착, 총 1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다소 늦었다.
여기서 대원사까지 지도 상 5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다.
총 18시간 계획했는데 그마저도 어려울듯 싶을 정도로
시간은 지체되고있었다.
이젠 중봉에서부터는 내리막이기에 시간은 좀 더 단축할 수 있을것이다.
스틱 두개를 불끈 쥐고 거의 뛰다시피 하산을 시작한다.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는 약 12km 거리다.
<천왕봉>
생각은 없다. 아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려가자 내려가"라는 생각 외에는 다른 잡념은 없었다.
물도 음식도 먹지않고 그냥 내달린 시간이 천왕봉~대원사까지였다.
나도 모르게 도착한 치밭목 산장이다.
천왕봉에서 1시간 30분 걸린 하산에만 몰두했던 정신나간 시간이었다.
"아니 그냥 가면 되지 구태여 왜 뛰어?"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뛰어 내는 건 언제나 마라토너의 숙명이다.
사실 의미 없는 행위겠지만, '나름의 의미'는 각자의 소명으로 치부하면 된다.
그 와중에 무제치기 폭포의 아름다움을 지켜보리란 기대를 했든 건
나역시 지리산꾼이란 반증일 터이다.
화사했던 단풍은 모두 지고 없었지만, 그대신 전 날 내렸던 비 덕분에 물줄기는 다소 시원해졌다.
무제치기 폭포의 수량은 아마도 지리산 여타 폭포 중 제일 적을것이다.
흔히 새재삼거리라 부르는 요충지다.
항상 이곳에서 새재로 잘 걸어갔다. 구태여 먼 거리의 대원사까지 걸을 이유가 별로 없었기 떄문이다.
이번에는 화대종주가 목표다.
행위의 차이에 따라 대원사로 향했지 결코 권유하고 싶지 않은 정말 지루한 길이다.
거의 뛰다시피한 길이다.
새재삼거리에서 대원사까지 5.9km...걸으면 약 2시간 정도 걸리지만, 뛰면 1시간이면 된다.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 12km 구간, 3시간 14분 걸렸다.
<새재삼거리>
대원사에 도착하니 17:53분
새벽 01:09 출발해서 17:53분에 도착했으니 총 16시간 44분이 걸렸다.
18시간 계획했는데 천왕봉에서 열심히 뛴 덕분에
동료의 채근을 좀 피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기다린 동료의 지루함을 덜어주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사실 어느정도 시간의 줄임은 개인적인 목표이기도 했었다.
14시간 심지어 12시간 이내에서 완주하는 사람들도 있고보면
그다지 좋은 기록은 아니지만 무탈하게 완주했다는 뿌듯함은 충분하다.
이건 개인적인 도전이다.
산행에 마라톤의 패턴을 접목시킨 산악마라톤 방식으로 들이 밀었다.
정해진 시간이면 그 시간안에 완주해야 하는게 마라톤의 숙명이다.
이건 개인적인 목표치로 행한것이니 구태여 각자의 철학에 반하다고 하여 반문하진 말자
각자의 즐거움은 다를 수 있음이다.
완주의 뿌듯함 , 그건 안해 본 사람은 평생 모른다.
'산행기 > 지리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두류~중봉골~천왕봉~일출봉능선~중산리 (0) | 2013.09.29 |
---|---|
중산리~천왕봉~장터목~중산리 (0) | 2013.01.11 |
국골~허공달골 (0) | 2012.10.22 |
대소골~달궁능선 (0) | 2012.10.08 |
도장골~거림골 (0) | 2012.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