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귀신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는 흰 소복에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귀신.
그러나 이 여귀 이미지는 196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전통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은 지난해 방영된 <전설의 고향> 스틸 이미지. | KBS
“서양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살인마나 괴물보다 ‘전설의 고향’과 같은 데서 나오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은 한국 여자귀신이 더 무섭다.” 전형적으로 회자되는 여귀(女鬼)론이다. 여기서 일단 궁금한 점. 왜 여귀의 의상은 하필이면 하얀색의 치마저고리, 즉 소복일까.
일단 소복은 죽은 사람이 입는 옷이 아니다.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에 따르면 ‘매장복식’이 어느 정도 파악되는 시기는 조선 초기부터다. 고려시대는 화장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계층에 따라 염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양반의 경우 수의를 30벌 넘게 입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최 학예사는 “매장 때 입힌 옷은 ‘가장 화려하고 좋은 옷’이다”며 “남자의 경우 관리가 돼서 궁궐에 들어갔을 때 입었던 관복, 여성은 혼례 때 입은 옷을 각각 입히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서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옷감의 재질 등도 떨어지고 가짓수도 적지만 화려한 옷을 선호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
실제 고전에는 여귀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 소설인 <장화홍련전>의 원형은 <아랑전설>이다. <고금소총>에 실린 아랑은 ‘가슴에 칼을 꽂고 유혈이 낭자한 채 큰 돌덩어리를 안고’ 나타난다. 즉 원귀는 죽을 때 모습 그대로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장화홍련전>의 경우 철산 부사 정동호 앞에 나타난 것은 홍련의 원귀(寃鬼)다. 소설은 이때 홍련의 외모를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녹의홍상, 즉 연두저고리에 다홍치마의 미인”이라고 거론한다. 녹의홍상은 일반적으로 혼례복을 지칭한다. 즉 실제 고전의 이미지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은’ 이후 전형적인 여귀 이미지와는 달랐다.
고전 속 여자귀신 묘사 오늘날과 달라
일본 에도시대의 유령화 이미지 (마루야마 오쿄 작). 한국적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소복에다 풀어헤친 장발의 여귀 이미지를 담고 있다.
모티브만 빌려온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을 제외하면 <장화홍련전>은 모두 다섯 차례 영화화됐다. 1924년에 만들어진 <장화홍련전>은 모든 스태프가 조선인인 최초의 영화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1924년, 1936년, 1956년의 <장화홍련전>은 현재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문예봉이 출연한 1936년작 스틸 속에서 ‘여귀’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나마 볼 수 있다. 흑백이지만 역시 ‘녹의홍상’으로 추정된다.(사진참조) 반면에 1972년 이유섭 감독의 <장화홍련전> 포스터 속 여귀의 모습은 전형적인 흰 소복에다 산발머리다.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한국 여귀의 상을 세운 영화로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감독, 1967)를 꼽는다. 한국 공포영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백문임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그의 책 <월하의 여곡성>에서 “‘기생’을 둘러싼 비극과 처첩 갈등을 끌어와 공포영화로 변형시킨 작품으로 한국 공포영화의 출발”이라고 평가했다. 자살해 여귀가 된 월향은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친’ 이후 전형적인 한국 여귀의 완성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송곳니가 튀어나온 흡혈귀 타입의 이빨을 때때로 선보이는 점은 이채롭다.
권철휘 감독은 회고에서 “월하의 공동묘지를 찍을 당시 실제 공동묘지에서 밤을 새우는 등 각고의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신성일·김지미 주연으로 같은 해에 제작된 <두견새 우는 사연>(이규웅 감독) 역시 같은 형태의 여귀를 등장시킨다. 이때부터 소복 여귀는 한국 공포영화의 클리세(장르적 습관)가 된다.
1967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여귀가 소복과 긴머리에 드라큘라 이빨을 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한국영상자료원>
그러나 전문가들은 ‘소복 여귀’가 한국 고유의 것이라기보다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월하의 공동묘지> 이전에 제작된 공포영화들이 당시 일반 대중에게는 제약돼 있던 일본 공포영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 연장선에서 ‘소복 여귀’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냐는 것. 백 교수에 따르면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나 유현목 감독의 <한>(1967>, 하길종 감독의 <수절>(1973) 등은 일본영화 <도카이도 요쓰야 괴담(東海道四谷怪談)>(나카가와 노부오 감독, 1959), <괴담(怪談)>(고바야시 마사키, 1964)의 내용을 참조 또는 인용해 만들어졌다.
최근 공포영화평론집 <공포영화관>(장서가)을 낸 김시광씨는 “관련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가설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몇몇 밝혀진 사실로 볼 때 우리가 전통적인 한국적 여자귀신상으로 봤던 장발소복 여귀는 생각보다 훨씬 최근에 만들어진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후대에 의해 ‘만들어진 또는 발명된 전통’이라는 것이다. 김종대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는 더욱 직접적인 이미지로 1700년대 일본 화가들이 상상한 유령 그림을 제시한다.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성의 유령 그림을 보면 하복부가 피로 물든 것을 제외하곤 소복 여귀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에도시대 화가 마루야마 오쿄(円山應擧)가 그린 ‘유령화’들을 보면 이 소복 여귀의 완성태를 볼 수 있다.
‘근래에 조작된 전통’일 가능성 높다
1972년에 제작된 이유섭 감독의 <장화홍련전> 포스터. 장화와 홍련은 전형적인 소복 여귀의 모습이다.(왼쪽) 반면에 스틸로만 남아 있지만 문예봉 주연의 1936년판 <장화홍련전> 속 여귀의 모습은 실제 원전에 묘사된 ‘녹의홍상’의 의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오른쪽)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완성된 ‘전통여귀’의 모습은 그후 TV시리즈 ‘전설의 고향’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 고착된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1980년대 후반부터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1998)이 나오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한국 공포영화의 맥이 거의 끊겼다는 것. 김한상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는 “1980년대까지는 기존의 공포영화 관습이 되풀이되다가 한국영화 제작환경이 변하면서 전반적으로 B급 저예산 장르이던 공포영화가 퇴조했다”며 “<여고괴담> 이후의 공포영화들은 그동안 주로 비디오 등을 통해 미국 공포영화 등의 문법을 습득한 신진 감독들이 새롭게 주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일본 여귀의 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링>의 나카타 히데오(中田秀夫) 감독이 만들어낸 사다코는 전통적인 여귀와 분명 차이가 있었지만 이후 제작된 한국 공포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화평론가 허지웅씨는 “공포영화의 부흥기라고 할 만큼 많은 편수의 영화가 해마다 제작됐지만 하나같이 소복, 긴 머리에 관절꺾기를 하는 사다코 타입의 괴물이 등장함으로써 한국 공포영화는 부흥과 동시에 다시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공포영화는 어떻게 될까. 허씨는 “사실 아시아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태국 공포영화의 대두와 같은 새 흐름이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장르 자체가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또다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글 출처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200908061549111&pt=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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