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뛰어난 계곡을 꼽으라면?
지리산에서 딱히 순위를 따질 법한 계곡이 있을까?
이 말은 그 급이 너무 높아 딴은 순위를 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과하기 때문이란
개인적 뇌피셜이다.
칠선계곡, 한신계곡, 뱀사골, 도장골, 조개골, 만수천, 중산리계곡 등등
지리산은 수많은 계곡을 품고 있지만 사실 모두 험하고 그 격이 높아 웅장한 멋과 비경을
따로이 정하기 힘들다.
어디로 가도 사실 지리산 계곡은 험하고 웅장하되 그리고 그 멋이 비범하여
숫자로 침범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는 있겠지만
딴은 순위 매김이란 산신령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곳, 지리산이다.
태풍과 장마가 온, 지리산.
뱀사골이 거칠기만 하다. 거의 화개재까지 10km에 육박하는 거친 계곡이며 길고 긴
지리산의 최고 계곡 다운 뱀사골.
지금껏 걸어온 횟수야 세기가 힘들 정도로 방문했지만
이토록 거친 면모를 본 경우는 몇 번 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진 후 찾아가는 지리산.
그 남다른 이유는 따로있다.
바로 폭포를 보기 위함이다.
그것도 산신령이 꼭꼭 숨겨 놓은 비경의 폭포.
뱀사골에서 함박골로 오르는 중턱에 자리 잡은 일명 이끼폭포.
흔히 실비단폭포로 더 많이 회자되는 폭포가 있는데
이 폭포의 비경은 지리산에서는 가히 으뜸이다.
아주 오랜만에 이 실비단폭포를 목도하기 위해 함박골을 찾았다.
비가 주구장천 내린 그 직후에 말이다. 왜냐하면 폭우로 난리법석을 떨 이때 가야 제대로 된 폭포의 웅장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함박골, 이 신령스런 폭포가 있는 곳.
뱀사골 본류에서 벗어나 거칠고 정비되지 않는 험한 골짜기를 1시간 여 오르면
만나는 비경 속 폭포.
반야봉에서 발원하여 뱀사골로 떨어지는 함박골은
원시림 가득한 지리산 안에서도 사람 손길이 묻지 않은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사람 발길 뜸한 한적한 곳이자 아주 위험한 곳.
바로 그곳에 이 실비단폭포가 숨어있다.
"우아...."
감탄사는 신음이 되어 나직히 함박골에 울린다.
역시 이 시기 딱 맞춤한 걸음.
이끼가 많다 보니 방울 방울 떨어지는게 아니라
세세히 떨어져 비단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실비단 폭포.
CNN에서 한국에서 꼭 봐야될 50곳 중 하나로 소개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거야 남의 나라 방송사 이름 빌려와 만든 뜬소문일 수 있겠지만
어쨌던 국내를 대표하는 장소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듯하다.
더 많은 수량이 있었다면 폭포는 더욱 멋진 비경을 보일지 몰라도
만일 그랬다면 불어난 계곡 탓에 폭포까지 접근이 힘들다.
뱀사골 본류에서 여기까지,
함박골에서 묘향대의 거친 오름도 계곡을 왔다갔다 하면서 올라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비가 내린다면 길이 끊겨버려 적당한 지금이 최고의 시기,
수량이 많으면 더 볼만하겠지만
그에 비례 길은 더욱 험난해져 접근하기도 힘들고 더 위험해진다.
이 정도 수준에도
함박골 오르는 데 제법 고충이 깊었다.
계곡 건너는 데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고
골짜기는 미끄러워 걷기에 쉽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실비단폭포를 견문하였다.
이제 그 격동했던 광경을 뒤로하고 함박골로 거친 오름을 시작한다.
"아이고 이거 완전 죽을 고생이네"
길은 묵었고 희미해 갈 수록 점입가경이다.
특히나 미끄러운 길, 그나마 희미해져
보이질 않는다.
오룩스맵으로 이리저리 간신히 잡아 생고생 몇번 한 후에
드디어 능선으로 붙었다.
그때부터 고생은 시작.
박짐 짊어지고 오르는 이 고역한 길에서 흘리는 땀방울로 진을 뺐다.
"으악~ 차가워"
정신이 번쩍드는 짜릿한 계곡물.
냉장고에서 갓 꺼낸 물과 거의 같은 수준의 청량감.
손이 시려 수건 씻기도 어려운 수준의 짜릿함이다.
계곡 아래와 상류의 온도 차이는 극과극.
땀으로 흠뻑 밴 옷을 씻어 그대로 입었더니
정말 시원했었다.
예전 오룩스맵이 없던 시절, 서너 번 이곳을 오르락내리락한 적이 있었다.
비단 지리 산꾼들이면 의례 반야봉으로 직등하는
이 골짜기를 탐미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때보다 이 골짜기가 더 묵어지고 희미해졌다면
의아하지 않겠는가
십여 년 세월이 흘렀는데 되려 그때보다 길이 더 묵어버린 건
나의 기분 탓일까
오룩스맵을 켜고서도 길이 희미해 서너 번 진을 빼는
광경을 연출하고서야 제대로 된 길에 안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직관에 의존해 올랐던 예전에도 이리 헤매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하기사 길이란 게 단 한 해만 사람이 뜸해도 금방
묵어지고 희미해진다.
특히나 지리산 같은 원시 지대, 길 사라지는 건 한순간.
예전보다 사람들이 확실히 덜 다니는 모양인지 십수 년이 흘렀지만 지금이 더 묵은듯 하다.
기분탓만은 아닐듯.
오르막은 갈 수록 점입가경. 산꾼을 희롱한다.
이윽코 시선은 하늘을 향한다.
"예전에도 이리 힘들었나?"
그때의 사정과 지금의 현실이 같지 않음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신체의 기능이 둔한 것도 있을테지만
박짐을 짊어지고 이 습하고 무더운 오르막을 오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나 내내 되새김했었다.
"이런 빌어먹을" 어디에 해도 듣지 못할 내면의 욕을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서산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을 즈음에
드디어 묘향대에 도착. 예정보다 1시간이나 늦었다.
황소같은 개가 냅다 짖어 들기 시작하더니
길을 막는다.
"누구시요"
스님의 경계스런 목소리에 생고생하면서 오른 산꾼의 불쌍한 인상을 보여주니
스님 목소리가 부드럽게 바뀐다.
애초 삼도봉에서 비박할 예정이었지만
묘향대 공터에 터를 잡고 그대로 쓰러진다.
묘향대에서 공터까지는 20분 거리.
물이 흐르는 계곡 옆이라 물 걱정은 없다.
그동안 야영한 적이 없는지 터가 바르지 못해 자갈과 돌을 치우고
정비하니 딱 텐트 한동 칠 만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여러동 칠 정도의 공간은 있지만
그럴려면 제법 정비가 필요할 정도로 공터도 많이 거칠어졌다.
옆의 계곡에서 수건으로 온 몸을 닦고
흠뻑 땀으로 적셔진 축축한 옷을 벗고 뽀송한 옷을 입으니
그리 상쾌할 수가 없다.
저녁은 늘 그렇치만 단촐하다.
'황후의 밥 걸인의 찬'
요샌 햇반을 이용하니 밥을 따로 지을 필요도 없고
포장된 국거리를 이용하면 별도로 끓일 필요가 없다.
지리산 흑돼지에 밥만 먹어도 그냥 한끼가 뚝딱이다.
사위는 깜깜하고 조용하다.
벌레가 렌턴으로 몰려들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였지만
그래도 모기는 없었다. 하기사 이 청정 심심 산골에 뭔 모기가 있을 것인가
머리가 다이자 그대로 실신.
눈뜨보니 아침이었다.
밤새 춥지는 않았고 되려 침낭 위에 잠을 잘 정도로 기온은
훈훈했었다.
해발 1,700M 남짓한 곳에서 이렇게 따뜻하게 밤을 지내 본 적이 있는가 싶다.
햇볕은 게으른 산꾼을 그만 두지 않을려는 듯 이 고산에서 조차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는다.
결코 시원하지 않는 뜨거운 햇살
반야봉 아래, 그날은 뜨거웠다.
서둘러 아침을 지어 먹고 엉덩이를 떨추니
삼도봉까지 이리 멀었나 싶다.
주능선에서 묘향대까지는 1.2km .
나는 지척인줄 착각했었다.. 가도 가도 너무 멀기에
다른 길이 있었나 싶을 정도.
이미 머리속 지우개가 다 지워버렸기는 했지만
사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길 그리고 똑같은 거리다.
그날, 그냥 힘들었을 뿐이다.
"소금장수 무덤 근처에 박터가 있다"
라는 지인의 정보에 잠시간 근처를 훑어 보았지만, 터라는 게 등산로 근처라
딱히 박 터로 추천할 장소는 아니다.
예전 이곳에서 박짐 짊어지고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삼도봉 말고 반야봉에서 결국 짐을 풀었었다. 삼도봉은 장소가 마땅치 못하다.
이제 이곳에서 길고 긴 뱀사골 10km을 걸으면 반선이 나온다.
시간은 발빠른 자 2시간.
느린자 4시간으로 각자의 능력치에 따라서 이 길은 시간이 극명하다.
왜냐하면 이 길은 우락부락 등산로가 아니라 매끈하니 길이 좋기 때문에
2시간이면 얼추 10km은 충분히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쉬엄쉬엄 걸으면
그건 한도 끝도 없이 걸리는 건 당연지사.
"빠르면 2시간"이라고 삼도봉에서 뱀사골로 내려가는 커플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나중 반선 입구에서
"좀비면 2시간 걸리겠네요"라며 된소리가 요동친다.
박짐을 짊어진 그날, 천천히 알탕까지 즐기니 4시간 걸렸는데
얄플한 배낭 맨 그 커플은 왜 4시간이나 걸렸는지 모를일이다.
간만에 찾은 지리산, 쉽지 않은 루트였지만
지리산 최고의 비경 실비단폭포를 제대로 목도했다는 사실에
산행의 묘미를 제대로 만끽한 1박2일 지리산 여행이었다.
날씨가 무덥지만 또 언제 그랬냐듯 분명 시원해질 날이 올 것이다.
어느듯 가을로 향해 가는 지리산.
이미 구절초가 피고 쑥부쟁이가 피기 시작했으니 지리산의 가을은 이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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